박해 속에 피어난 복음 – 장재형목사

장재형목사

장재형목사가 사도행전 8장 1–5절을 중심으로 한 설교·강의를 토대로 본문이 말하고 있는 초대교회의 역사와 복음 전파, 그리고 그 정신을 현대 교회가 어떻게 이어받아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신학적·실천적 고찰을 담았다. 또한 장재형목사가 강조해온 ‘참된 복음’과 ‘역사를 꿰뚫는 하나님 나라’의 시각을 중심으로, 환란 속에서도 진전하는 복음의 능력과 교회의 새 시대적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초대교회의 핍박, 흩어짐, 그리고 복음의 확장

사도행전 8장 1–5절은 초대교회가 겪은 극심한 박해와 그로 인해 교회가 흩어지는 장면을 증언한다. 특히 사도행전 7장에서 돌에 맞아 순교한 스데반의 죽음 이후, 교회 공동체에 대한 대대적 탄압이 시작되었다. 스데반이 죽자마자 많은 성도들이 심한 두려움을 느꼈고, 예루살렘 교회를 대상으로 한 핍박이 가혹하게 일어났다. 이로 인해 “사도들 외에는 다 흩어졌다”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교회 공동체는 각 지역으로 흩어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사울(훗날 바울)이 교회를 잔멸하고자 각 집을 수색하며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는 일까지 벌어졌다(행 8:3). 당시 핍박을 받은 성도들은 마치 큰 홍수에 휩쓸린 자처럼,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도행전 8장은 이러한 ‘흩어짐’이 결코 복음의 후퇴나 실패를 의미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성도들이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도피하듯 몸을 숨겼어도, 그곳에서 그들은 “복음의 말씀을 전”하게 된다(행 8:4). 인간적으로 보면 ‘슬프고 겁먹은 영혼’들의 이동이었으나, 하나님의 시선에서 보면 이 사건은 복음의 지경을 확장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을 벗어나 사마리아에까지 이르는 복음 전파가 본격화되었고,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더욱 넓은 지역으로 뻗어나가게 되었다.

이 대목은 예수님의 지상명령(Great Commission)을 다시금 상기시키기도 한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며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는데(마 28:19–20),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하신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성장하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자신들이 본격적으로 땅끝까지 가야 한다는 분명한 사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정 기간 동안은 한곳에 머무르는 상태로 안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스데반의 순교와 박해로 말미암아 억지로라도 흩어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복음 전파의 지평이 예루살렘 너머로 확대되었다.

이 장면을 두고 교회사학자들은 ‘사탄의 역설적 실패’라고 부르기도 한다. 악한 세력이 교회를 탄압함으로써 복음을 막으려 했지만, 오히려 그 탄압이 복음을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두려움과 비극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오히려 구원의 역사를 진전시키는 열쇠로 작용한 것이다. 이것은 초대교회 시절뿐 아니라 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 빈번히 나타난 패턴이다. 교회가 고난당할수록 복음은 오히려 더 멀리 퍼져나갔고, 성령의 권능을 힘입은 성도들은 그 흩어진 장소에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했다.

이와 같은 역사적 패턴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해의 정도와 형태는 달라졌으나, 교회가 세상 속에서 겪는 어려움과 핍박은 여전히 존재한다. 동시에 교회 내부에도 왜곡된 사상이나 복음을 흐리는 이단적 흐름, 또는 편협한 교권주의와 물질적·인간적 욕심 등이 섞여 들어올 때가 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가현설(도케티즘, Docetism)이라든지 영지주의(Gnosticism) 같은 잘못된 사상들이 성도들을 현혹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우리가 구원에 이르려면 스스로 안에 있는 어떤 신적 파티클(particle)을 개발해 온전한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복음을 흔들어 놓았다. 이런 내부적 도전과 외부적 박해 속에서도, 초대교회는 결국 ‘바른 복음’을 지켜냈고, 오히려 온 세상으로 뻗어나가는 원동력을 발견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초대교회의 모습을 주목하면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환란을 겪을 수는 있어도, 진정한 복음 전파의 사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해 왔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영광 중에도 사역할 수 있지만, 고난 중에도 여전히 놀라운 방법으로 복음을 펼쳐가신다. 성령은 억지로 흩어지게 된 상황에서조차 각 사람의 마음에 함께하시고, 그 교회 공동체가 흩어진 자리에서 새로운 역사와 만나게 하신다. 이런 이유로 “핍박과 환란이 결코 복음 전파의 동력을 잃게 하지는 않는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선교 현장에서의 도전과 역경을 ‘새로운 기회’로 해석하고 수용하는 교회론을 제시한다.

실제로 사도행전 8장 4절,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라는 구절은 ‘흩어짐’이 ‘사라짐’이 아니라 ‘확장’이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사람의 눈에는 패배처럼 보일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 광범위한 이동과 재배치를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이 증거되도록 하셨다. 당시 사마리아 지역은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던 땅이었고, 사회·종교적으로 유대와 갈등을 빚어온 역사가 있었다. 그런데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했을 때, 그곳에서도 많은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주로 고백했다(행 8:5 이하). 이 사건은 지리적·문화적 경계를 넘어서는 복음의 능력을 증거한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로, 세상이 갑자기 바뀌고 예상하지 못했던 시련이 몰려올 때—이를테면 전 세계를 뒤흔든 코로나19 팬데믹 같은 환란의 시기—예배 형태나 교회의 활동이 크게 제한될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핍박’이든 ‘환란’이든 어떠한 형태로든 겪게 되는 이 어려움을 하나님의 광대하신 목적 속에서 바라볼 때, 그것은 결국 새로운 형태의 복음 전파와 교회 공동체 형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환란을 만나 산산이 흩어지는 상황에서도, 성령이 머무는 교회는 결코 무너질 수 없다”라는 확신을 자주 강조한다. 성령은 모아주시기도 하지만 흩어지게도 하시며, ‘보이는 교회(visible church)’와 ‘보이지 않는 교회(invisible church)’를 아우르신다. 현대 교회가 예배당 건물이나 제도적 틀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복음을 인터넷이나 미디어를 통해 전하며, 다양한 문화적·사회적 접촉점을 활용해서 ‘보이지 않는 교회’를 넓혀 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초대교회 당시 성령이 흩어진 자들과 함께하셔서, 그들이 가는 곳마다 새로 세워지는 교회를 탄생시켰던 원리와 맞닿아 있다.

사도행전 8장에서 확인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교회가 ‘환란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 있다는 점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박해가 임하지 않았더라면 편안함에 안주하며 예루살렘 교회에만 모여 있을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박해라는 극단적 상황을 통해 성도들을 세상 구석구석으로 보내신다. 이 점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기쁜 노래를 부르며 자발적으로 흩어져 나간다면 얼마나 더 좋겠는가”라고 자주 역설한다. 즉, 억지로 몰려서가 아니라, 복음의 시급성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열정에 사로잡혀 자발적으로 떠나는 ‘순종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1장 28–30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두 아들의 비유처럼, 말만 하고 가지 않는 아들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자가 되어야 교회는 한순간의 환란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환란 때에 어쩔 수 없이 몸을 피하듯 복음을 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이미 ‘언제 어디로든 보냄받아 갈 준비가 된’ 상태여야 한다는 메시지다. 바울 역시 훗날 로마 황제의 박해 아래서도 끊임없이 편지를 써 교회들을 돌보았고, 감옥에서조차 복음을 전하였다(빌 1:12–14). 초대교회의 이 같은 모습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복음 전파의 원형질이다.

또한, 교회가 문화적·지역적 특수성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세워져야 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 사마리아에 내려간 빌립의 사역은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전통 유대교 관습과는 다른 새로운 문화적 맥락에 복음을 심어 넣은 사례다. 이와 유사하게 바울은 갈라디아, 에베소, 고린도 등 서로 다른 도시·문화권에 교회를 세울 때, 거기에 맞는 접근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다.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 에베소서 4장 등에서도 교회의 다양성 속의 일치를 강조하고 있으며, 각 지역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기능하되, 그 모양과 구조가 획일적이지 않음이 나타난다.

장재형목사는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명언, “종교는 문화의 본질이고, 문화는 종교의 옷이다(As religion is the substance of culture, culture is the form of religion)”를 자주 인용하며, “복음이라는 본질은 결코 바뀌지 않지만, 그것을 담고 있는 문화의 옷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라고 해석한다. 지금처럼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에는 SNS, 스트리밍, 온라인 커뮤니티, 화상회의 등 다양한 매체가 ‘복음을 담는 옷’이 될 수 있다. 결코 복음 자체를 변개해선 안 되지만, 전파의 형태와 교회 공동체 조직 방식은 얼마든지 달리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초대교회가 사도행전 8장 이후 점차 유대·사마리아를 넘어 소아시아와 로마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의 특성을 반영해 복음을 전한 것처럼, 현대 교회도 새로운 미디어와 방식, 여러 문화 영역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현대 교회에 당면한 또 다른 도전은 ‘개인의 구원’과 ‘역사의 구원’을 함께 균형 잡아 바라보는 것이다.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큰 주제는 창조, 타락(죄), 구원,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사망이 없고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 다시 없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과정’을 최종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거대 담론으로서의 역사를 이해할 때, 개인이 구원받는 것뿐만 아니라, 이 땅의 역사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함께 꿈꾸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역사의식이 현대 교회에서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초대교회 제자들이 예수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물었을 때(행 1:6), 예수님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정하셨다”라고 답하셨으나, 동시에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라고 당부하셨다. 이 땅의 역사 속에 복음이 자라나고, 하나님의 나라는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소망 안에서, 교회는 끊임없이 다음 세대를 일으켜 세우고, 전 세계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단순히 예배당 안에서만 머무르거나 교세 확장만을 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메시지가 사도행전 8장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초대교회는 스데반의 순교와 함께 불어닥친 대규모의 박해로 인해 성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이 흩어짐이 오히려 복음 전파의 문을 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반대와 핍박을 통해서도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며, 성령의 권능은 흩어진 성도들의 입과 발, 그리고 삶을 통해 새로운 지역에 복음을 뿌리내리도록 하셨다. 교회는 억지로 밀려나서가 아니라, 자발적 순종과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기꺼이 ‘땅끝’을 향해 가야 한다. 이것이 사도행전 8장 1–5절이 보여주는 초대교회의 모습이며, 또한 장재형목사가 늘 강조해온 복음 전파의 정신이기도 하다.

2. 현대 교회의 도전, 새로운 복음 전파 방식

사도행전 8장을 통해 확인한 초대교회의 역동성과 성령의 역사는 오늘날 교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문제는 시대가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교회가 세워진 1세기 지중해 세계와 비교할 때, 현재 인류는 기술, 문화, 경제, 정치, 사회 모든 면에서 엄청난 변화를 경험해 왔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많은 교회가 전통적인 예배 형태와 모임 방식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빠르게 온라인 예배나 비대면 모임을 시도해야 했다. 어떤 지역에서는 모이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신앙을 잃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동시에, ‘대면 예배’에 대한 지나친 고집으로 사회적 비판을 받기도 했다. 교회가 과연 이런 급변하는 환경에서 어떻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이어갈 것인지가 주요 과제로 떠올랐다.

장재형목사는 오랜 기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선교와 목회 활동을 해오면서, “교회가 건물을 벗어나 사람들의 실제 생활 영역 속으로, 그리고 미디어의 장(場) 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거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름다운 발’을 가지고 먼 나라를 직접 찾아가야만 했다면(롬 10:15), 현대에는 ‘미디어’가 발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과 SNS, 모바일 기기가 발달함에 따라, 교회는 직접 사람이 오지 않아도 복음을 전달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를 얻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메시지를 어떻게 전할 것인가’이며, 그 메시지의 핵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라는 불변의 진리여야 한다.

실제 장재형목사는 “Moving Forward”라는 슬로건처럼, 교회가 후퇴하거나 정체되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핍박이 닥치면 핍박 속에서, 환란이 오면 환란 속에서, 평안한 시기가 오면 평안함 속에서—어떤 상황에서도 교회는 절대 복음 전파의 엔진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초대교회처럼 ‘흩어지는 교회’가 되면 약화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 흩어짐이 ‘네트워크화’된 재배치로 작용할 수도 있다. 현 시대의 교회는 SNS나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흩어져 있으면서도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예루살렘 교회가 스데반의 순교 이후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갔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이 ‘새로운 교회의 형태’는 단지 모임을 온라인으로 바꾸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교회 운영, 제자훈련, 전도·선교 등의 모든 측면에서 디지털 환경을 교회 본연의 사명과 창의적으로 결합해야 한다는 의미다. 과거 초대교회가 회당과 성전, 그리고 가정 교회라는 다양한 형태를 오가며 사람들을 가르쳤던 것처럼, 현대 교회도 예배당, 온라인, 가정, 지역 커뮤니티 센터 등 다양한 공간을 활용해 복음을 심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헌금, 재정 운용, 인력 양성, 성찬과 세례 같은 성례전의 진행 등, 전통적 교회가 익숙하게 유지해 온 요소들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적용할 것인지는 상당히 신학적이고도 실천적인 과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본질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강조한다. 교회의 본질, 곧 “그리스도의 몸이자 성령의 전이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는 공동체”라는 사실만 분명히 붙들고 있다면, 옷과 같은 외형적 문화 형식이 바뀌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본질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성령의 내주, 하나님의 나라 완성에 대한 소망 등 기독교 진리의 핵심 교리는 시대를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다.
  2. 형식은 변할 수 있다.
    예배당 중심 예배에서 온라인 예배로 확장되거나, 주일 한 번 모이는 형태에서 주중 소그룹 혹은 지역 공동체 활동으로 늘어나거나, 교회 재정 운영 방식이 바뀔 수 있다. 이것은 본질과 충돌하지 않는 한 모두 ‘문화의 옷’에 해당한다.
  3.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
    핍박이 오든 환란이 오든, 혹은 교회가 비교적 평온하고 사회적 신뢰를 받고 있든,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성령은 때로는 흩어지게도 하시고, 때로는 한데 모이게도 하시며, “어떻게, 어디서, 누구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신다. 빌립이 사마리아로 인도받아 복음을 전했고(행 8:5), 또한 이디오피아 내시의 수레 옆으로 가서 말씀을 가르친 것처럼(행 8:26–39), 현대 교회도 성령의 인도 아래 움직여야 한다.
  4. 새 시대에 맞는 교육과 제자 양성이 필수적이다.
    초대교회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지만, 회당에서 말씀을 교육했고, 가정 교회나 작은 모임에서도 끊임없이 가르쳤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미 자녀를 교육하는 전통이 강했기에, 회당 교육이 효과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다. 현대 교회도 시대의 변화에 맞는 교육 플랫폼, 청소년·청년 사역 모델, 온라인 성경 공부, 미디어 활용 등을 개발해야 한다. 이것이 없이는 교회가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다음 세대에게 복음을 전수할 수 없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원칙하에, “디자이너와 IT worker를 귀하게 여기라”고 강조한다. 복음 전파의 ‘아름다운 발’이 이제는 IT 인프라와 디지털 콘텐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이 ‘새로운 발’을 잘 활용하려면, 이를 이끌 인재가 필요하고, 그러한 인재가 실력을 발휘하여 디지털 사역을 활성화해야 한다. 크리스천 디자이너, 영상 편집자, IT 전문가, 온라인 마케터 등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재능을 봉사와 사역으로 연결한다면, 전 세계 어디든 즉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창구가 열릴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그는 “교회가 하나의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초대교회는 교인들이 공동체적으로 재산을 나누고(행 2:44–45), 사도들의 가르침을 함께 배우며(행 2:42), 서로 돌보고 교제했다. 오늘날 교회도 이러한 ‘연결’과 ‘돌봄’ 기능을 디지털 환경에서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신자들이 말씀을 배우고, 서로 소식을 나누며, 지역사회의 어려운 이들을 돕고, 개인 상담과 기도 요청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렇게 교회가 플랫폼화되면, 물리적 공간의 제약이나 거리의 장벽을 뛰어넘어 훨씬 더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동시에 성도 간의 교제를 풍성하게 할 수 있다.

나아가,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에게 주신 구원 역사의 흐름 안에 있다”는 ‘역사 신학적’ 시각을 늘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사도행전 1장 8절에 언급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과도 맞닿아 있다. 단지 지역 교회만을 성장시키는 것을 넘어서, 지구상의 모든 민족과 나라가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교회가 끊임없이 준비하고 파송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교회가 여러 나라에 맞는 ‘현지화된 형태’로 세워져야 한다. 음식 문화, 의복, 언어, 인프라 환경 등은 제각각 다르기에, 어느 지역 교회든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선 현장의 상황에 맞게 적응해야 한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소아시아, 로마 등 각기 다른 문화권에 맞춰 교회 모델을 달리했음을 상기시키며,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와 유대인의 정체성을 함께 활용해 복음을 폭넓게 전했던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오늘날 인터넷은 이러한 ‘다양한 문화권’을 한꺼번에 연결할 수 있는 획기적 통로다. 이를 통해 선교가 훨씬 더 빠르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예컨대,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 마을에 직접 선교사가 들어가기 이전에, 온라인 콘텐츠나 통역 영상을 통해 먼저 복음을 소개할 수도 있다. 또는 현지의 소규모 공동체가 온라인으로 훈련을 받고, 함께 기도와 예배를 드릴 수도 있다. 이를 체계적으로 운영하려면 교회가 ‘디지털 선교 센터’나 ‘온라인 미션 스쿨’ 같은 조직을 마련하고, 교역자나 선교사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새로운 시대로 가는 길을 예비하는 교회”라고 칭하며, “곧 새벽이 오리라”라는 확신 속에 교회가 선제적으로 움직이길 촉구한다.

그는 또한 “마지막 때에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 과정”에 적극 동참해야 할 필요성을 부단히 제기한다. 초대교회에서부터 이뤄져 온 복음 확장이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며, 다양한 장애와 영적 전투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교회를 통해 계속 일하시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오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해 복음이 먼저 전파되어야 한다”(막 13:10)는 말씀대로 역사적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결국, 초대교회가 가졌던 영적 DNA—곧 환란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복음 확장의 발판으로 삼았던 불굴의 믿음, 문화와 지역 경계를 뛰어넘어 기꺼이 흩어져 간 선교 정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순종—이 현대 교회에도 필요하다는 결론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DNA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미디어와 IT 기술, 온라인 네트워크, 그리고 시대적 문화 트렌드를 적극 활용하여 전 세계로 나아가는 교회를 형성하길 촉구한다.

핵심은 ‘바른 복음’과 ‘참된 교회론’을 견지하는 것이다. 아무리 최신 기술과 플랫폼을 사용한다 해도, 복음 자체가 흐려지거나 진리가 왜곡되면 교회의 생명력은 사라진다. 반대로, 복음의 핵심이 견고히 서 있고 교회의 본질을 지키는 가운데, 시대 변화에 능숙하게 대처하며 다양한 사역을 시도한다면, 초대교회의 “흩어지는 중에도 전진하는 교회”가 오늘날에도 힘차게 재현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추수의 때’를 맞이하고 있다고 자주 언급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영적 갈급함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찾아 방황하는 시대이기에, 교회가 정확하고도 따뜻한 복음을 제시한다면 많은 영혼이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다. 사도행전 8장 8절 이하에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많은 사람을 고치고 복음을 전했을 때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고 나와 있다. 이처럼 기쁨이 없는 세상 가운데 기쁨이 전해지고, 절망하는 곳에 소망이 전해지는 것이 복음 사역의 핵심이자 결실이다.

한편, 교회가 이렇게 ‘흩어지는 교회’이자 ‘네트워크 교회’로 변모하는 과정에서는 내부적으로 여러 가지 도전이 뒤따른다. 기존 제도권 교회 내부에서 이러한 변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호의적이지 않을 수 있고, 물리적 예배당과 공동체성을 중시하는 전통 교인들과 갈등이 발생할 수도 있다. 성찬이나 세례를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문제, 직분의 위임과 목회적 치리가 어떻게 이뤄질지 등에 대한 신학적 논의도 아직 충분히 정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재형목사는 “복음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이 모든 논의를 거치면서도 결국 전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예루살렘 교회와 사마리아, 더 나아가 안디옥 교회가 함께 겪었던 시행착오의 현대판”이라고 부른다. 유대인 중심의 초대교회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맞닥뜨린 문화적, 신학적, 실천적 갈등(행 10장, 갈 2장 등)을 생각해 보면, 교회 역사는 언제나 자기 갱신과 확장을 통해 성장해 왔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까지 ‘완성된 형태’로 머무는 법이 없으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개혁하고 복음의 지평을 넓혀가야 한다.

결론적으로, 사도행전 8장 1–5절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흩어짐과 복음 확장’은, 현대 교회가 갈 길을 조명하는 강력한 등불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는 늘 성령의 능력이 함께하며,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주도하신다. 교회가 성령께 순종해 모일 때는 모이고, 흩어질 때는 흩어져야 한다. 이 원리를 현대에 적용할 때, ‘보이지 않는(invisible) 교회’와 ‘보이는(visible) 교회’가 동시에 작동하는 시대적 교회론이 가능해진다. 또, 개인 구원만이 아닌 역사의 구원을 꿈꾸는 거시적 안목 속에서, 이 세상의 흐름을 성경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의 섭리에 맞추어 모든 열방으로 나아가는 ‘미디어 시대의 선교’가 활짝 열릴 수 있다.

장재형목사가 제시하는 방향은 결국 “상황에 매이지 않되, 상황을 역이용해 복음 확장을 이루라”는 메시지에 요약된다. 이는 초대교회가 박해를 ‘전진의 계기’로 삼은 것처럼, 현대 교회도 역병이나 사회적 제약, 문화적 편견과 불신 속에서도 여전히 ‘Moving Forward’ 해야 한다는 의미다. 성령은 지금도 살아계시며, 교회를 통해 역사하시고,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모든 민족과 열방에 나타내신다. 교회는 그 부름에 응답하여—흩어지든 모이든,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끊임없이 복음을 말하고 나누어야 한다.

사도행전 8장에서 스데반의 죽음에 대한 큰 울음 뒤에도 빌립이 사마리아로 내려가 복음을 선포하며 기쁨을 전했던 것처럼, 현대 교회도 오히려 어려운 시대 한복판에서 기쁨과 소망의 메시지를 증거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핍박과 환란이 클수록, 성령의 임재와 권능은 더욱 강하게 역사할 수 있음을 기억하자. 그렇기에 우리가 이 땅에서 순례자로 살면서도 담대해질 수 있고, 어떤 모양으로든 교회를 이어가며 복음을 확장해 갈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배후에는, 초대교회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며, 그 하나님께서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모든 복음의 일꾼에게 “가라, 그리고 전하라”라고 명령하신다. 핍박이나 환란이 아니라, 사랑과 순종과 기쁨의 동력으로 자발적으로 나아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한국 교회, 세계 교회가 사도행전적 부흥과 역동성을 다시금 회복하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사명을 다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핵심은 “초대교회 역사를 통해 본 복음의 확장과 현대 교회가 마주한 변화, 그리고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바른 복음과 새로운 교회 패러다임”이다. 초대교회는 박해 속에서도 흩어짐이 복음 확장의 계기가 되었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어디에서나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다. 현대 교회는 다른 차원의 도전에 직면했지만, 여전히 같은 성령과 동일한 복음을 붙들고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부각하면서, “교회가 이제 시대에 맞춰 유연하고도 강력하게 확장해 가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사도행전 8장을 자세히 살피며 깨닫게 되는 진리이며, 믿음 공동체로서 실천해야 할 분명한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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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a] Donde el temblor se detuvo, el poder cobarde siempre prometió un “después” – Pastor David Jang (Olivet University)

En la residencia del gobernador en Cesarea, adonde llega el viento húmedo del Mediterráneo, un pesado silencio y una tensión densa se extienden sobre el suelo de mármol. Bajo el emblema del águila que exhibe el esplendor del Imperio romano, el gobernador Félix está sentado con ropajes fastuosos. Frente a él, de pie, está el apóstol Pablo con un pobre atuendo de prisionero. A simple vista, esto parece un juicio ordinario en el que la ley del imperio interroga a un simple reo. Pero si abrimos los ojos espirituales y miramos de cerca esta escena, este lugar se convierte en un inmenso campo de batalla espiritual, donde el poder más fuerte del mundo choca de frente con una verdad que el mundo no puede soportar.

La fría hoja del estigma, escondida tras una elocuencia brillante
La obra de 1890 del pintor realista ruso Nikolái Ge (Nikolai Ge), ¿Qué es la verdad? (What is Truth?), ofrece una inspiración sorprendente para comprender el paisaje de este tribunal. En el cuadro, Pilato viste una toga suntuosa, pero permanece en las sombras, dándonos la espalda con un cinismo helado; en cambio, Jesucristo, humilde, se encuentra en plena luz y, con su silencio, proclama la verdad con más fuerza que cualquier discurso. El tribunal de Cesarea no es diferente. El abogado Tértulo abre su acusación con un torrente de halagos al gobernador, pero en la punta de su lengua se oculta una hoja fría: llamar a Pablo “una peste” y marcarlo como “cabecilla de la secta de los nazarenos”.

El pastor David Jang, a través de su sermón sobre Hechos de los Apóstoles 24, capta con agudeza que este “etiquetado” o estigmatización (labeling) no es solo una técnica de los tribunales antiguos, sino también la forma típica en que el mundo se relaciona con el evangelio hoy. Como el mundo teme la verdad y el debate teológico, siempre evita lo esencial y busca amordazar la verdad colocando marcos como “caos social” o “amenaza al sistema”. Sin embargo, Pablo no se dejó llevar por la provocación. Confesó serenamente que él es alguien “en Cristo”, y elevó el asunto del tribunal desde un plano meramente jurídico a la dimensión de la fe en la resurrección y la perspectiva teológica. Aquello no fue una excusa humillante de un prisionero, sino un rugido valiente que proclamaba que incluso los tribunales del mundo están bajo la soberanía de Dios.

El poderoso en la oscuridad, el prisionero en la luz
A medida que avanza el juicio, ocurre un extraño giro de inversión. Félix, sentado en el estrado, se vuelve cada vez más inquieto, y Pablo, encadenado, se vuelve más libre. En lugar de rogar clemencia por su propia seguridad, Pablo expone ante el gobernador y su esposa “la justicia, el dominio propio y el juicio venidero”. El pastor David Jang interpreta este pasaje como la cumbre del ministerio de Pablo y como un enfrentamiento frontal del evangelio contra el poder. La “justicia” es el criterio de Dios que interpela a un gobernante corrupto; el “dominio propio” es una advertencia al poder empapado de codicia; y el “juicio” es un mensaje como trueno que recuerda la existencia de un tribunal eterno por encima de la ley del imperio.

Así como Pilato, en el cuadro de Nikolái Ge, dio la espalda a Jesús —la Verdad— y se internó en la oscuridad, Félix también tembló de miedo ante el mensaje de Pablo. Su conciencia reaccionó ante la luz de la verdad. Pero la tragedia radica en que ese temblor no desembocó en arrepentimiento. Félix dice: “Por ahora, vete; cuando tenga oportunidad, te llamaré”. El pastor David Jang señala que esta “postergación” (procrastinación) es, precisamente, uno de los errores espirituales más fatales que puede cometer el ser humano. El temor podía haber sido el umbral de la gracia, pero él no cruzó ese umbral: se quedó calculando. En el momento en que el oportunismo y el cálculo político ahogaron la voz de la conciencia, la oportunidad de salvación se desvaneció como niebla.

Decir “lo escucharé después” es un anestésico que adormece el alma
Félix mantuvo a Pablo bajo custodia durante dos años. En la superficie, eso parece un tiempo de “detención” injusta para Pablo. Pero la profunda meditación bíblica del pastor David Jang reinterpreta esos dos años de silencio no como un fracaso, sino como un tiempo de “maduración”. El reloj de Dios nunca se detuvo: esos dos años fueron un periodo de preparación en el que Pablo, antes de ir a Roma, consolidó con más firmeza la esencia del evangelio. Mientras el poder del mundo alargaba el tiempo esperando sobornos, Dios usó ese tiempo para proteger y formar a su apóstol.

¿Ante el tribunal de quién estamos hoy? El mundo todavía nos tienta a “transigir lo suficiente” y a “elegir un silencio seguro antes que una verdad incómoda”. Pero Hechos de los Apóstoles 24 nos pregunta: ¿serás como Félix, que aunque sintió el temblor promete un “después” y retrocede, o serás como Pablo, que aun atado habla de “justicia, dominio propio y juicio”? Como exhortó el pastor David Jang, en el mundo de la fe no existe el “después”. Cuando el Espíritu Santo hiere el corazón con convicción, ese instante es el “ahora” en el que debemos decidir.

El poder cobarde siempre conspira por un mañana conveniente, pero la fe verdadera enfrenta el hoy incómodo. En el tribunal de nuestro trabajo, nuestro hogar y nuestra sociedad, lo que debemos aferrar no son discursos brillantes ni habilidades de supervivencia social. Solo la vida de resurrección de Jesucristo, solo el poder del evangelio, nos hace verdaderamente libres. Anhelo que hoy también, sin encogernos ante los juicios del mundo, nos sea concedida a todos una valentía santa para vivir la verdad con firmeza, como Pablo de pie en la lu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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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コラム】震えが止んだ場所で、卑怯な権力はいつも「次」を約束した – ダビデ 張 牧師 (Olivet University)

地中海の湿った風が吹き込むカイサリアの総督官邸。大理石の床の上に、重い沈黙と張りつめた緊張が漂っています。ローマ帝国の威光を誇る鷲の紋章の下、総督フェリクスが華やかな衣をまとって座っています。その向かいには、みすぼらしい囚人服を着た使徒パウロが立っています。見た目には、帝国の法が一人の罪人を取り調べる、ごくありふれた裁判の場にすぎないように見えるでしょう。けれども霊の目を開いてこの場面を見つめるなら、ここはこの世で最も強大な権力と、この世が到底担いきれない真理とが真正面から衝突する、巨大な霊的戦場(戰場)なのです。

華麗な弁舌の裏にされた、冷たい烙印の刃

ロシアの写実主義画家ニコライ・ゲ(Nikolai Ge)による1890年作『真理とは何か?(What is Truth?)』は、この法廷の光景を理解する上で驚くほどの示唆を与えてくれます。絵の中でピラトは華麗なトガをまといながらも暗い影の中に立ち、冷笑的に背を向けています。対して、粗末な姿のイエス・キリストは明るい光の中に立ち、沈黙そのものによって真理を雄弁に語っています。カイサリアの法廷も、これと大差ありません。弁士テルトロは、きらびやかな美辞麗句で総督を持ち上げて口火を切りますが、その舌先に隠れていたのは、パウロを「疫病(伝染病)」と呼び、「ナザレ人の異端のかしら」と烙印を押す冷たい刃でした。

ダビデ・張牧師は、使徒の働き24章の説教を通して、この「レッテル貼り(Labeling)」が古代法廷の技術にとどまらず、現代の世界が福音に向き合う典型的なやり方でもあることを鋭く捉えます。世界は真理や神学的論争を恐れるがゆえに、いつも本質から目をそらし、「社会の混乱」や「体制への脅威」というフレームをかぶせて、真理の口を塞ごうとします。ところがパウロは、その策謀の前で取り乱しませんでした。自分が「キリストのうちにある」者であることを淡々と告白し、法廷の争点を単なる司法の次元から、復活信仰という神学的洞察の次元へと引き上げていきます。これは囚人の卑屈な言い訳ではなく、世の法廷さえも神の主権の下にあることを宣言する、堂々たる獅子吼でした。

闇にいる力者、光の中に立つ囚人

裁判が進むほどに、不思議な逆転現象が起こります。裁きの席に座るフェリクスは次第に不安に支配され、鎖につながれたパウロはますます自由になっていきます。パウロは自分の身の安全のために寛大な処置を乞うのではなく、むしろ総督夫妻に向かって「義と節制と、来たるべきさばき」について論じます。ダビデ・張牧師はこの場面を、パウロの働きの頂点であり、権力に対する福音の真正面からの勝負だと読み解きます。「義」とは腐敗した統治者に突きつけられる神の基準であり、「節制」とは貪欲に溺れた権力への警告であり、「さばき」とは帝国の法の上に存在する永遠の大法廷を思い起こさせる、雷鳴のようなメッセージだったのです。

ニコライ・ゲの絵の中のピラトが、真理そのものであるイエスを背にして闇へ歩み去ったように、フェリクスもまたパウロのメッセージの前で恐れて震えました。彼の良心は、真理の光に反応したのです。しかし悲劇は、その震えが悔い改めへと結びつかなかったことにあります。フェリクスは言います。
「今は帰れ。都合のよい時が来たら、お前を呼ぼう。」
ダビデ・張牧師は、この「先延ばし(Procrastination)」こそが、人が犯しうる最も致命的な霊的過ちだと指摘します。恐れは恵みの敷居になり得たのに、彼は計算機を叩き、その敷居を越えませんでした。便宜主義と政治的計算が良心の声を覆い隠した瞬間、救いの機会は霧のように消えていったのです。

「次に聞く」という言葉は、魂を眠らせる麻酔剤

フェリクスはパウロを二年も拘留しました。表面的には、それはパウロにとって理不尽な「停止」の時間のように見えます。けれどもダビデ・張牧師の深い聖書黙想は、その二年の沈黙を失敗ではなく、「熟成」の時として再解釈します。神の時計は一度も止まったことがなく、その二年はパウロがローマへ向かう前に福音の精髄をいっそう堅固にするための準備期間でした。世の権力は賄賂を期待して時間を引き延ばしましたが、神はその時間を用いてご自分の使徒を守り、鍛え上げられたのです。

今日、私たちは誰の法廷に立っているのでしょうか。世界は今もなお、「ほどほどに妥協しろ」「不都合な真実より安全な沈黙を選べ」と誘惑します。しかし使徒の働き24章は私たちに問いかけます。あなたはフェリクスのように震えを感じながらも「次」を約束して退くのか、それともパウロのように縛られたままでも「義と節制とさばき」を語るのか。ダビデ・張牧師が語った勧めのとおり、信仰の世界に「次」はありません。聖霊が心を刺すとき、その瞬間こそが決断すべき「今」なのです。

卑怯な権力はいつも都合のよい「いつか」を企てますが、真の信仰は不都合な「今日」に向き合います。私たちの職場と家庭、そして社会という法廷で、握りしめるべきものは華麗な弁論や処世術ではありません。ただイエス・キリストの復活のいのち、その福音の力だけが、私たちを真に自由にするのです。今日も世の判断の前で萎縮することなく、光の中に立つパウロのように堂々と真理を生き抜く聖なる勇気が、私たちすべてに臨むことを願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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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onique] Là où le tremblement s’est arrêté, le pouvoir lâche a toujours promis « plus tard » – Pasteur David Jang (Olivet University)

Dans la résidence du gouverneur à Césarée, d’où souffle l’air humide de la Méditerranée, un lourd silence et une tension palpable s’étendent sur le sol de marbre. Sous l’emblème de l’aigle, fierté de l’Empire romain, le gouverneur Félix siège, revêtu d’habits somptueux. En face de lui se tient l’apôtre Paul, vêtu d’une tenue de prisonnier, misérable en apparence. À première vue, ce n’est qu’un tribunal ordinaire : la loi de l’Empire interrogeant un simple accusé. Mais si l’on ouvre les yeux de l’esprit, la scène se révèle autrement : c’est un immense champ de bataille spirituel où s’affrontent, de front, la puissance la plus redoutable du monde et une vérité que le monde ne peut contenir.

La lame froide du stigmate, dissimulée derrière l’éloquence

Le tableau réaliste de 1890 du peintre russe Nikolaï Gué (Nikolai Ge), « Qu’est-ce que la vérité ? » (What is Truth?), offre une inspiration saisissante pour comprendre le paysage de ce tribunal. Dans la peinture, Pilate porte une toge éclatante, mais se tient dans l’ombre, tournant le dos avec un cynisme glacial. À l’inverse, Jésus-Christ, pauvrement vêtu, demeure dans une lumière vive : son silence lui-même proclame la vérité. Le tribunal de Césarée n’est pas différent. L’avocat Tertulle ouvre la séance en flattant le gouverneur par une rhétorique luxuriante ; mais au bout de sa langue se cache une lame froide : il qualifie Paul de « peste » (un fléau contagieux) et le marque au fer rouge comme « chef de la secte des Nazaréens ».

Par sa prédication sur Actes 24, le pasteur David Jang saisit avec acuité que cet « étiquetage » (labeling) n’est pas seulement une technique des tribunaux antiques, mais aussi la manière typique dont le monde, aujourd’hui encore, traite l’Évangile. Le monde redoute la vérité et la confrontation théologique ; il détourne donc toujours le regard de l’essentiel pour plaquer un cadre commode — « trouble social », « menace pour le système » — afin de faire taire la voix de la vérité. Pourtant, Paul ne s’emporte pas devant la machination. Il confesse calmement ce qu’il est « en Christ », et élève l’affaire du plan strictement judiciaire à la hauteur d’une perspicacité théologique : la foi en la résurrection. Ce n’était pas l’excuse servile d’un prisonnier, mais un rugissement de lion : la proclamation que même les tribunaux du monde se trouvent sous la souveraineté de Dieu.

Le puissant dans l’ombre, le prisonnier dans la lumière

À mesure que le procès avance, un renversement étrange se produit. Félix, assis sur le siège du juge, devient de plus en plus inquiet ; Paul, enchaîné, paraît de plus en plus libre. Au lieu de supplier pour son sort, Paul va jusqu’à exposer devant le gouverneur et son épouse un enseignement sur « la justice, la maîtrise de soi et le jugement à venir ». Le pasteur David Jang interprète ce passage comme un sommet du ministère de Paul — une confrontation frontale de l’Évangile avec le pouvoir. La « justice » est la norme de Dieu adressée à un dirigeant corrompu ; la « maîtrise de soi » est l’avertissement lancé à un pouvoir ivre de convoitise ; et le « jugement » est un message tonitruant rappelant qu’au-dessus du droit impérial existe une Cour suprême éternelle.

Comme Pilate, dans le tableau de Nikolaï Gué, qui détourne le regard de Jésus — la Vérité — pour entrer dans l’obscurité, Félix lui aussi tremble devant le message de Paul. Sa conscience réagit à la lumière de la vérité. Mais la tragédie tient à ceci : ce tremblement ne conduit pas à la repentance. Félix dit : « Pour le moment, retire-toi ; quand j’en trouverai l’occasion, je te rappellerai. » Le pasteur David Jang souligne que ce « report » (procrastination) est l’une des erreurs spirituelles les plus fatales que l’être humain puisse commettre. La crainte aurait pu devenir le seuil de la grâce ; mais, calculatrice en main, Félix refuse de franchir ce seuil. Lorsque le confort et les calculs politiques recouvrent la voix de la conscience, l’occasion du salut se dissipe comme une brume.

« J’écouterai plus tard » : un anesthésiant pour l’âme

Félix maintient Paul en détention pendant deux ans. En surface, cela ressemble à un temps d’arrêt injuste, imposé à Paul. Mais la méditation biblique profonde du pasteur David Jang réinterprète ce silence de deux années non comme un échec, mais comme un temps de « maturation ». L’horloge de Dieu ne s’est jamais arrêtée : ces deux ans furent une période de préparation, où Paul affermit l’essentiel de l’Évangile avant d’aller à Rome. Le pouvoir du monde cherchait des pots-de-vin et faisait traîner les choses ; Dieu, lui, a utilisé ce temps pour protéger son apôtre et le fortifier.

Aujourd’hui, devant le tribunal de qui nous tenons-nous ? Le monde continue de nous tenter : « Compromets-toi juste un peu », « choisis un silence sûr plutôt qu’une vérité inconfortable ». Mais Actes 24 nous interroge : allons-nous, comme Félix, ressentir un tremblement puis promettre « plus tard » en reculant ? Ou allons-nous, comme Paul, même liés, parler de « justice, maîtrise de soi et jugement » ? Comme l’exhortation transmise par le pasteur David Jang, dans le monde de la foi, « plus tard » n’existe pas. Lorsque le Saint-Esprit pique le cœur, c’est précisément cet instant-là qui s’appelle « maintenant ».

Le pouvoir lâche cherche toujours un lendemain commode ; la foi véritable affronte l’aujourd’hui inconfortable. Dans le tribunal de notre travail, de notre foyer, et de notre société, ce que nous devons tenir n’est ni l’éloquence brillante ni l’art de ménager les choses. C’est uniquement la vie de résurrection de Jésus-Christ — la puissance de cet Évangile — qui nous rend réellement libres. Puissions-nous, aujourd’hui encore, ne pas nous laisser rapetisser par le jugement du monde, mais vivre la vérité avec une sainte audace, comme Paul debout dans la lumiè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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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Where the Trembling Stopped, Cowardly Power Always Promised “Next Time” – Pastor David Jang (Olivet University)

In the governor’s residence at Caesarea, where the humid Mediterranean wind drifts in, a heavy silence and tension settle over the marble floor. Beneath the eagle emblem that boasts the grandeur of the Roman Empire, Governor Felix sits dressed in splendid robes. Across from him stands the apostle Paul, clothed in the shabby garments of a prisoner. Outwardly, it looks like an ordinary courtroom—imperial law interrogating a mere criminal. Yet when we behold the scene with spiritual eyes, this is a vast spiritual battleground where the world’s mightiest power collides head-on with a truth the world cannot bear.

The Cold Blade of a Label Hidden Behind Flowery Rhetoric

Russian realist painter Nikolai Ge’s 1890 work What is Truth? offers striking inspiration for understanding this courtroom. In the painting, Pilate wears a magnificent toga, yet stands in dark shadow, turning his back with cynical indifference. By contrast, the humble Jesus Christ stands in bright light, proclaiming truth through silence. The scene in Caesarea is no different. The lawyer Tertullus opens with lavish flattery of the governor, but what lies behind his polished words is a cold blade—branding Paul a “plague” and stigmatizing him as “the ringleader of the Nazarene sect.”

Through his sermon on Acts 24, Pastor David Jang incisively observes that this kind of “labeling” is not merely a legal tactic of ancient courts, but also the world’s typical way of dealing with the gospel today. Because the world fears truth and theological confrontation, it repeatedly avoids the essence and instead tries to silence truth by framing it as “social disorder” or a “threat to the system.” Yet Paul does not flare up in the face of such schemes. Calmly confessing that he is one “in Christ,” he elevates the courtroom’s issue from a merely legal dispute to the theological horizon of resurrection faith. This was not the cringing excuse of a defendant, but a bold, lion-like proclamation that even the courts of this world stand under the sovereignty of God.

A Ruler in Darkness, a Prisoner Standing in the Light

As the trial continues, a strange reversal unfolds. Felix, seated on the judgment bench, grows increasingly uneasy, while Paul, bound in chains, becomes ever more free. Instead of pleading for mercy for his own safety, Paul turns toward the governor and his wife and speaks of “righteousness, self-control, and the judgment to come.” Pastor David Jang interprets this moment as the summit of Paul’s ministry and the gospel’s direct confrontation with power. “Righteousness” is God’s standard aimed at a corrupt ruler; “self-control” is a warning to power drenched in greed; and “judgment” is a thunderous message reminding them of an eternal Supreme Court that stands above imperial law.

Just as the Pilate in Ge’s painting averts his eyes from Jesus, who is Truth, and walks into darkness, Felix too trembles in fear before Paul’s message. His conscience reacts to the light of truth. Yet the tragedy is that the trembling does not lead to repentance. Felix says, “Go away for now; when I have an opportunity, I will send for you.” Pastor David Jang points out that this “procrastination” is one of the most fatal spiritual mistakes a person can make. Fear could have become the threshold of grace, but instead Felix tapped his calculator and refused to step over that threshold. The moment convenience and political calculation drowned out the voice of conscience, the opportunity of salvation vanished like mist.

“I’ll Listen Next Time” Is an Anesthetic That Puts the Soul to Sleep

Felix kept Paul confined for two years. On the surface, it appears to be an unjust “pause” forced upon Paul. Yet Pastor David Jang’s deep meditation on Scripture reinterprets those two silent years not as failure, but as a time of “maturation.” God’s clock never stopped; those two years became a season of preparation in which Paul strengthened the essence of the gospel before going to Rome. Worldly power dragged time out in hopes of a bribe, but God used that same time to protect and refine His apostle.

So today, in whose courtroom are we standing? The world still tempts us to “compromise just enough,” to “choose safe silence over uncomfortable truth.” But Acts 24 presses a question upon us: Will you, like Felix, feel the tremor and still retreat by promising yourself “next time”? Or will you, like Paul—bound and yet free—speak of “righteousness, self-control, and judgment”? As Pastor David Jang’s exhortation reminds us, in the realm of faith there is no “next time.” When the Holy Spirit pierces the heart, that moment is the “now” in which we must decide.

Cowardly power always schemes for a convenient tomorrow, but true faith faces the discomfort of today. In the courtrooms of our workplaces, our homes, and our society, what we must hold onto is not polished argument or worldly savvy. It is the resurrection life of Jesus Christ—only the power of that gospel truly sets us free. May a holy courage come upon us all, so that we do not shrink back before the world’s verdict, but live out the truth boldly, like Paul standing in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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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专栏] 战栗停下的地方,怯懦的权力总是把希望押在“下次” – 张大卫牧師 (Olivet University)

地中海潮湿的风掠过该撒利亚的总督官邸,沉重的沉默与紧张在大理石地面上弥漫。在彰显罗马帝国威严的鹰徽之下,总督腓力斯身着华服端坐。与他相对的,是穿着破旧囚衣的使徒保罗。表面看来,这不过是帝国法律在审问一个微不足道的囚犯的寻常庭审;然而若以属灵的眼光凝视,这里却是世上最强大的权势,与世人无法承载的真理正面相撞的巨大属灵战场。

华丽辞藻背后,隐藏着冷酷的“贴标签”刀锋
俄罗斯现实主义画家尼古拉·盖(Nikolai Ge)1890年的作品《什么是真理?》(What is Truth?)为理解这幅法庭图景提供了惊人的启发。画中的彼拉多虽披着华丽的托加,却站在幽暗阴影里,以冷嘲的姿态背对众人;而衣着朴素的耶稣基督立于明亮之光中,以沉默雄辩真理。该撒利亚法庭的景象也并无二致。控方代言人帖土罗以华丽的辞藻称颂总督、拉开序幕,但他舌尖所藏的,却是把保罗称作“瘟疫”,并扣上“拿撒勒教门头目”的冷酷刀刃。

张大卫牧师在《使徒行传》第24章的讲道中敏锐指出,这种“贴标签(Labeling)”不仅是古代法庭的技巧,更是今日世界对待福音的典型方式。世界惧怕真理与神学的交锋,便常常回避本质,转而以“社会动荡”“威胁体制”的框架封口,试图堵住真理的声音。然而,保罗并未在这谋略面前躁动或失控。他平静承认自己是“在基督里”的人,将法庭争议从单纯司法辩护的层面,提升到以复活信仰为核心的神学洞见层面。这不是囚徒卑屈的自保之词,而是一声宣告:连世上的法庭也在上帝主权之下——这是昂首的狮吼,而非低头的辩解。

黑暗中的掌权者,光中站立的囚徒
审理越推进,越出现一种奇异的逆转:坐在审判席上的腓力斯愈发不安,被锁链捆住的保罗却愈发自由。保罗没有为自身安危求情,反倒向总督夫妇讲论“公义、节制,以及将来的审判”。张大卫牧师将此视为保罗事奉的高峰——也是福音向权势发起的正面交锋。“公义”是上帝对腐败统治者的标准;“节制”是对沉溺贪欲之权力的警告;“审判”则如雷霆般提醒:在帝国之法之上,仍有永恒的大法庭。

正如尼古拉·盖画中的彼拉多背离真理的耶稣、走入黑暗,腓力斯也在保罗的信息面前惧怕战栗。他的良知确曾在真理之光前作出反应;悲剧在于,那战栗并未结出悔改的果子。腓力斯说:“你暂且去吧,等我得便,再叫你来。”张大卫牧师指出,这种“拖延(Procrastination)”恰恰是人所能犯下最致命的属灵错误。惧怕本可以成为恩典的门槛,但他却敲打着算盘,没有跨过去。当便利主义与政治算计盖过良知的声音,救恩的机会便如薄雾般消散无踪。

“下次再听”是麻醉灵魂的麻药
腓力斯竟将保罗拘留了整整两年。表面看,这似乎是保罗蒙冤、被迫“停摆”的岁月;然而张大卫牧师深沉的圣经默想,却把这两年的沉默从“失败”重新诠释为“成熟与酝酿”的时间。上帝的时钟从未停止,那两年是保罗在前往罗马之前,更加扎实凝练福音精髓的预备期。世上的权力为了贿赂而拖延时间,但上帝却使用这段时间,保护并锤炼祂的使徒。

那么今天,我们站在谁的法庭里?世界仍在诱惑我们“适度妥协”,劝我们“宁可选择安全的沉默,也不要触碰令人不适的真相”。然而《使徒行传》第24章向我们发问:你是否会像腓力斯一样,明明感到战栗,却仍把决定推给“下次”,转身退后?还是会像保罗一样,即便被捆锁,仍不回避地说出“公义、节制与审判”?正如张大卫牧师的劝勉:在信仰的世界里,并不存在“下次”。当圣灵刺透人心的那一刻,就是必须作出抉择的“此刻”。

怯懦的权力总在经营一个方便的将来;真实的信仰却敢于直面不舒适的今天。在我们工作的现场、家庭的关系,以及名为社会的法庭里,我们当抓住的不是华丽的辩词或世故的处世术,而是耶稣基督复活的生命——唯有福音的大能,才能真正使人得自由。愿我们今日也不在世人的判断前退缩,像站在光中的保罗那样,以圣洁的勇气坦然活出真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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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떨림이 멈춘 자리, 비겁한 권력은 언제나 ‘다음’을 기약했다,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

지중해의 습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이사랴의 총독 관저, 대리석 바닥 위로 무거운 침묵과 긴장이 감돕니다. 로마 제국의 위용을 자랑하는 독수리 문장 아래, 벨릭스 총독이 화려한 의복을 입고 앉아 있습니다. 그 맞은편에는 초라한 죄수복을 입은 사도 바울이 서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것은 제국의 법이 한낱 죄인을 심문하는 평범한 재판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을 뜨고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이곳은 세상의 가장 강력한 권력과 세상이 감당치 못할 진리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거대한 영적 전장(戰場)입니다.

화려한 언변 뒤에 숨겨진 차가운 낙인의 칼날

러시아의 사실주의 화가 니콜라이 게(Nikolai Ge)의 1890년작 <진리는 무엇인가?(What is Truth?)>는 이 법정의 풍경을 이해하는 데 놀라운 영감을 줍니다. 그림 속 빌라도는 화려한 토가를 입고 있지만 어두운 그림자 속에 서서 냉소적인 등을 보이고, 반면 초라한 예수 그리스도는 환한 빛 가운데 서서 침묵으로 진리를 웅변합니다. 가이사랴 법정의 풍경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변사 더둘로는 화려한 미사여구로 총독을 칭송하며 포문을 열지만, 그 혀끝에 숨겨진 것은 바울을 ‘염병(전염병)’이라 칭하고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낙인찍는 차가운 칼날이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사도행전 24장 설교를 통해, 이 ‘낙인찍기(Labeling)’가 고대 법정의 기술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상이 복음을 대하는 전형적인 방식임을 예리하게 포착합니다. 세상은 진리와 신학적 논쟁을 두려워하기에, 언제나 본질을 외면한 채 ‘사회적 혼란’이나 ‘체제 위협’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진리의 입을 막으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략 앞에서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임을 담담히 고백하며, 법정의 이슈를 사법적 차원에서 부활 신앙이라는 신학적 통찰의 차원으로 끌어올립니다. 이는 죄수의 비굴한 변명이 아니라, 세상의 법정마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선포하는 당당한 사자후였습니다.

어둠 속의 권력자, 빛 가운데 선 죄수

재판이 진행될수록 기이한 역전 현상이 일어납니다. 심판석에 앉은 벨릭스는 점점 불안해지고, 쇠사슬에 묶인 바울은 더욱 자유로워집니다. 바울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선처를 호소하는 대신, 도리어 총독 부부를 향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을 바울 사역의 절정이자, 권력을 향한 복음의 정면 승부로 해석합니다. ‘의’는 부패한 통치자를 향한 하나님의 기준이며, ‘절제’는 탐욕에 젖은 권력자를 향한 경고이고, ‘심판’은 제국의 법 위에 존재하는 영원한 대법원을 상기시키는 천둥과 같은 메시지였습니다.

니콜라이 게의 그림 속 빌라도가 진리이신 예수를 외면하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듯, 벨릭스 역시 바울의 메시지 앞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의 양심은 진리의 빛 앞에서 반응했습니다. 그러나 비극은 그 떨림이 회개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에 있습니다. 벨릭스는 말합니다.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장재형 목사는 이 ‘유예(Procrastination)’야말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영적 실수라고 지적합니다. 두려움은 은혜의 문턱이 될 수 있었지만, 그는 계산기를 두드리며 그 문턱을 넘지 않았습니다. 편의주의와 정치적 계산이 양심의 소리를 덮어버린 순간, 구원의 기회는 안개처럼 사라졌습니다.

“다음에 듣겠다”는 말은 영혼을 잠재우는 마취제다

벨릭스는 바울을 2년이나 구류해 두었습니다. 표면적으로 그것은 바울에게 억울한 ‘멈춤’의 시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의 깊은 성경 묵상은 그 2년의 침묵을 실패가 아닌 ‘숙성’의 시간으로 재해석합니다. 하나님의 시계는 멈춘 적이 없으며, 그 2년은 바울이 로마로 가기 전 복음의 정수를 더욱 단단히 다지는 준비의 기간이었습니다. 세상 권력은 뇌물을 바라고 시간을 끌었지만, 하나님은 그 시간을 사용하여 당신의 사도를 보호하고 단련시키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의 법정에 서 있습니까? 세상은 여전히 우리에게 ‘적당히 타협하라’고, ‘불편한 진실보다는 안전한 침묵을 택하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4장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벨릭스처럼 떨림을 느끼고도 ‘다음’을 기약하며 뒤로 물러설 것인가, 아니면 바울처럼 묶인 채로도 ‘의와 절제와 심판’을 말할 것인가. 장재형 목사가 전한 권면처럼, 신앙의 세계에서 ‘다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마음에 찔림을 주실 때, 바로 그 순간이 결단해야 할 ‘지금’입니다.

비겁한 권력은 언제나 편리한 훗날을 도모하지만, 참된 신앙은 불편한 오늘을 직면합니다. 우리의 일터와 가정, 그리고 사회라는 법정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화려한 변론이나 처세술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그 복음의 능력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케 합니다. 오늘도 세상의 판단 앞에서 위축되지 않고, 빛 가운데 선 바울처럼 당당히 진리를 살아내는 거룩한 용기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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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영적 가치에 대한 갈망과 선택의 무게(창세기25장)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의 창세기 25장 강해는 에서와 야곱의 서사를 단순한 형제간의 다툼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 본문을 통해 인간이 삶에서 무엇을 가장 고귀하게 여기는지, 그리고 그 가치 평가가 개인과 공동체의 운명을 어떻게 결정짓는지를 조명합니다. 이 기록은 우리 내면을 비추는 영적인 거울과 같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장자권이 단순히 먼저 태어난 이의 기득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계승하고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할 거룩한 유산임을 다시금 배우게 됩니다.

언약의 통로이자 거룩한 책임의 무게

성경의 맥락에서 장자권은 가문을 대표하는 이름 이상의 가치를 지닙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약속이 역사 속에서 보존되고 확장되는 상징적 장치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정해진 운명대로 기계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선택과 결단을 통해 현실의 살결을 입습니다. 주어진 복이 실제적인 삶의 은혜로 전환되는 지점에는 언제나 인간의 태도가 개입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누구를 택하셨는가라는 신학적 주제와 더불어, 그 선택의 무게를 나는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가라는 실존적 질문을 동시에 던집니다.

눈에 보이는 질서 너머의 신비로운 섭리

본문은 에서와 야곱의 기질을 선명하게 대비시키며 시작합니다. 에서는 들의 사람으로서 용맹한 사냥꾼이었고, 야곱은 장막에 거하는 조용한 인물이었습니다. 당시의 생존 환경에서 에서는 가문의 안전과 먹거리를 책임질 적임자로 보였으며, 아버지 이삭의 편애 또한 그를 향해 있었습니다. 외형과 기능, 감정의 흐름까지 모든 상황은 에서에게 유리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외적인 질서 너머에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영적 표지가 현실 속에서 인간의 선택과 어떻게 얽히며 드러나는가 하는 점입니다.

찰나의 배고픔이 폭로한 내면의 지향성

두 형제의 운명이 엇갈리는 농축된 장면은 렌틸 죽 한 그릇의 거래에서 나타납니다. 사냥에서 돌아와 지쳐 있던 에서는 당장의 허기를 채우는 일을 가장 긴급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에서의 선택이 단발적인 실수가 아니라 오랫동안 축적된 내면의 방향성이 노출된 사건임을 강조합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귀하게 여기는 것은 위기와 결핍의 순간에 튀어나오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언약은 계산기가 아니라 경외함과 책임의 언어로 다뤄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에서는 영적 유산을 당장의 효용성이라는 잣대로 재단해버리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빚으시는 책임의 훈련장

반면 야곱은 도덕적으로 결코 완벽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형의 약점을 이용했고 속임수를 써서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설교의 흥미로운 지점은 이러한 야곱의 결함을 미화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결핍이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어떻게 책임의 훈련장으로 전환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야곱은 두려움이 많고 부족한 사람이었으나, 단 한 가지 사실에는 집요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을 결코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태도였습니다. 이러한 태도가 두 사람을 가르는 영적 분기점이 됩니다.

이 장면을 입체적으로 묘사한 얀 빅토르스의 유화 작품은 ‘지금 여기’의 욕구와 ‘그 너머’의 유산이 한 테이블 위에 놓인 찰나를 포착합니다. 신앙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선택의 장면에서 형체를 얻습니다. 우리는 매일 작은 거래의 순간들 앞에 서며, 그 반복된 선택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게 됩니다.

복을 소유하는 단계에서 복을 감당하는 단계로

야곱은 축복을 얻은 직후 안락한 성공을 누리는 대신, 형의 분노를 피해 도망자가 되어 고달픈 세월을 보냅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겪은 수많은 연단의 과정은 그를 ‘복을 얻으려는 사람’에서 ‘복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재구성하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결단은 단순히 목표를 움켜쥐는 순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목표가 내 삶을 흔들 때에도 포기하지 않고 나의 인격이 그 가치에 맞춰지도록 허용하는 지속적인 용기입니다.

에서는 상실 이후 통곡하며 후회했지만, 성경은 그를 망령된 자로 경계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가볍게 여긴 가치가 결국 우리 내면에서 효력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영적 감각은 매일의 습관과 우선순위를 통해 서서히 형성됩니다.

현대적 ‘붉은 것’과 영혼의 나침반

오늘날 우리는 즉각적인 만족을 부추기는 수많은 ‘붉은 것’들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즉각적인 소비와 자극이 넘쳐나는 환경에서 장재형 목사는 “너는 무엇을 가장 먼저 찾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배고픔이나 피곤함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그것이 영혼의 나침반이 되어 언약의 가치를 재평가하게 만들 때 위기는 시작됩니다. 가족이나 성공, 안전이라는 명분으로 본질을 팔아버리는 행위는 결국 더 깊은 영적 빈곤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갈 책임으로 이해할 때 우리의 삶은 더욱 넓어집니다. 신앙의 승계는 단순히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신념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에너지는 한계가 있기에 선택은 곧 투자이며, 그 투자는 우리가 무엇을 더 귀하게 여기는지 보여주는 고백이 됩니다.

영원한 약속을 붙드는 매일의 결단

복음은 야곱의 교활함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불안과 계산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바라보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장자의 축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에게 열려 있는 고귀한 기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것을 빼앗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은혜를 가볍게 여기지 않기 위해 자신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진짜 위태로울 때는 눈앞에 빵이 없을 때가 아니라, 그 빵 때문에 약속을 팔아버릴 때입니다. 현실의 압박이 아무리 거세더라도 그것이 최종적인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언약은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 속에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지 우선순위를 세워줍니다.

결국 창세기 25장의 서사는 우리를 경계와 소망으로 인도합니다. 소중한 것을 하찮게 여기지 말라는 경고와 동시에, 부족한 자일지라도 진짜 가치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자를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위로를 줍니다. 우리가 어떤 출발선에 서 있든, 오늘 더 귀한 가치를 선택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빚으시는 역사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당장의 편의보다는 영원한 약속을 선택하는 언약의 사람으로 서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요청되는 진정한 믿음의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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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옥중에서도 진보하는 복음과 바울

바울의 몸은 감옥에 묶여 있었지만, 복음은 결코 속박되지 않았다. 빌립보서 1장 18절에서 그가 던지는 “그러면 무엇이뇨?”라는 질문은 현실을 체념으로 덮어 버리는 말도, 상황을 낙관으로 미화하는 문장도 아니다. 그것은 복음이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살아 움직이는 능력임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자유의 언어다. 장재형(올리벳대학교 설립)목사는 이 옥중서신을 강해하며, 이 짧은 반문이 지닌 시야의 넓이를 오늘의 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신앙은 종종 환경과 분위기,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흔들리지만, 바울의 시선은 감옥의 벽을 넘어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이 알려지는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다. 그는 전하는 이들의 동기를 분석하기보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가 선포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기쁨의 근거로 삼는다.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복음이 삶의 우선순위를 재배치할 때 생겨나는 신학적 결단이다. 우리는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옥중’이라는 배경을 쉽게 지나치지만,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듯 감옥은 인간의 능력이 가장 분명히 한계를 드러내는 자리이자, 하나님의 섭리가 가장 뜻밖의 방식으로 드러나는 무대다. 바울은 이동의 자유를 잃었고, 계획을 펼칠 여지도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지키는 이들, 찾아오는 이들 사이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했고, 그 소식은 공동체를 움츠러들게 하기보다 오히려 담대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진보가 인간의 활동 반경보다, 하나님이 열어 두신 통로를 알아보는 영적 분별에 달려 있음을 본다.

장재형목사는 “복음은 매이지 않는다”는 선언을 오늘의 현실 속에서 반복해 묻는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스스로 한계를 규정하는가. 제도가 막혔다고, 여론이 차갑다고, 관계가 틀어졌다고, 교회가 분열되었다고 말하며 복음의 전진도 함께 멈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의 결박은 복음의 결박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속박은 새로운 청중에게 복음이 전달되는 통로가 되었고, 공동체가 믿음의 중심을 다시 세우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피하려 했던 자리에서,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길을 여신다. 이것이 옥중서신이 지닌 깊은 문법이다.

바울을 더욱 괴롭힌 것은 외부의 제약만이 아니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난 불순한 동기가 그의 마음을 찔렀다. 빌립보서 1장 15–17절은 시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들의 존재를 숨기지 않는다. 그들은 복음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그 마음에는 경쟁과 과시, 영향력에 대한 욕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바울의 수감 소식을 기회로 삼아 자신을 드러내고, 심지어 바울의 고통을 더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에서 교회를 이상화하려는 태도를 경계한다. 초대교회조차 완전히 순결한 동기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면, 오늘의 교회가 갈등을 경험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요한 것은 갈등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 갈등을 어떻게 해석하고 다루는가다.

바울의 위대함은 갈등을 모른 데 있지 않고, 갈등을 절대화하지 않은 데 있다. 그의 “그러면 무엇이뇨?”는 불순한 동기를 정당화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의 목적 앞에서 인간의 동기를 상대화하는 영적 선택이다. 바울은 자신의 명예나 평가를 중심에 두지 않았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는 것을 최종 가치로 삼았다. 그래서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의 의도를 분명히 보면서도, 그 의도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넓은 시각’은 바로 이런 자유에서 나온다. 좁은 시각은 모든 사건을 나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하지만, 넓은 시각은 사건을 하나님의 큰 이야기 속에 놓고 복음의 진보라는 기준으로 재정렬한다.

이 재정렬의 근원에는 바울의 하나님 이해가 있다. 하나님은 단순히 위로를 주시는 분이 아니라, 역사를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시다. 장재형목사는 바울이 이 신학을 개념으로만 붙든 것이 아니라, 감옥이라는 현실과 교회 내부의 갈등 속에서 삶으로 살아냈다고 말한다. 주권은 하나님이 역사를 통치하신다는 고백이고, 섭리는 그 통치가 목적 없는 우연이 아니라 의미를 향한 질서라는 믿음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결박이 헛되지 않음을 안다. 심지어 누군가의 불순한 동기조차도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과정에서 사용하실 수 있다는 급진적인 신뢰가 그를 지탱한다. 복음의 진보는 이상적인 조건이 모여 생기는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역설을 통해 여시는 길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불편한 질문을 피할 수 없다. 불순한 동기로 전해진 복음도 선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가. 바울은 동기의 왜곡을 선으로 바꾸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이 왜곡된 의도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드러내실 수 있음을 고백한다. 이것은 윤리적 무감각이 아니라, 섭리 신앙이 지닌 깊은 균형이다. 우리는 동기를 정결케 하도록 부름받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실패와 타인의 왜곡 속에서도 하나님이 역사를 멈추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는다. 장재형목사는 이 균형을 잃지 말라고 강조한다. 교회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되, 문제 때문에 복음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다.

바울의 태도는 오늘 교회가 갈등을 대하는 지혜이기도 하다. 우리는 사역의 열매를 비교하고, 영향력을 경쟁하며, 인정에 목말라한다. 같은 복음을 두고도 방식과 스타일, 신학적 취향으로 서로를 경계하며 분열을 키운다. 이때 바울의 질문은 우리를 멈춰 세운다. “지금 붙잡고 있는 분노와 억울함이,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는 일보다 더 중요한가.” 장재형목사는 이 질문이 사소한 문제를 절대화하는 마음을 무너뜨린다고 말한다. 복음이 중심에 설 때, 갈등은 다루어야 할 문제이지 신앙의 목적이 되지 않는다.

빌립보서 1장 20–21절에서 바울이 고백한 “살든지 죽든지”의 지평은 이러한 태도의 근간이다. 그리스도가 절대가 될 때, 삶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고, 죽음은 파멸이 아니라 통로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가치관의 전환이라고 부른다. 삶이 절대가 되면 우리는 작은 위협에도 흔들리지만,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면 감옥도 갈등도 궁극의 실재가 되지 못한다.

바울의 담대함은 현실을 모르는 무모함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약함과 제도의 벽을 정확히 알았다. 그럼에도 담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담대함의 근거가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였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성도의 담대함이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 확신은 쉽게 무너지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환경을 넘어선다.

결국 바울이 감옥에서 보여 준 태도는, 복음이 인간의 명예나 유불리를 초월하는 기쁜 소식임을 증언한다. 복음은 인간의 전략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며, 그 진보는 우리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서 시작된다. 장재형목사가 빌립보서 1장을 통해 오늘의 교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상황이 불리해도 복음의 길을 찾으라. 동기가 혼탁해 보여도 복음의 기쁨을 놓치지 말라.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라.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라. 이 시야를 회복할 때, 교회는 작은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바다 같은 마음으로 다시 기뻐할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의 고백처럼, 어떤 방식으로든 전파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라는 중심 위에 굳게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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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 목사, 방언·예언과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의 바른 해석

장재형(장다윗)목사는 고린도전서 14장을 오늘의 교회 현실과 곧바로 접속시키며, 성령의 은사가 실제 예배와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자유와 질서가 어디에서 만나는지를 차분하고도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바울이 25절에서 그려 보이는 장면—예언의 말씀이 불신자의 마음을 꿰뚫어 숨은 일이 드러나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교회의 본질을 압축한 그림이다. 교회는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를 과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말씀의 선포를 통해 인간 내면의 죄와 상처가 드러나고 치유되는 자리다. 그래서 장재형 목사는 어떤 프로그램보다도 말씀의 선포와 가르침을 교회의 첫 사명으로 내세운다. 빛이 비출 때 심중이 드러나고, 그 드러남이 회개와 경배로 이어지며, 그 순간이야말로 교회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언하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26절은 초대교회 예배의 생동감을 그대로 전한다.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침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특정 직분자가 모든 것을 주도하는 단선적 구조가 아니라, 성도 각자의 은사가 능동적으로 흘러드는 참여의 예배였다. 그러나 바울은 즉시 대원칙을 붙인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여기서 ‘덕을 세운다’는 오이코도메(oikodomē), 곧 집을 건축한다는 뜻이다. 개인적 감흥이나 영적 과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세워짐이 은사 사용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예배의 어떤 표현이든—찬양이든, 가르침이든, 방언과 통역이든, 계시의 나눔이든—교회를 실제로 ‘건축’하지 못한다면 방향을 고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령의 불은 반드시 사랑이라는 난로 속에서 타올라야 한다. 들불은 빨리 번지지만 금세 모든 것을 태워버리듯, 무절제한 은사 사용은 공동체를 지치게 만든다. 반대로 화덕 같은 은사는 오래, 깊게, 따뜻하게 공동체를 데운다.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풍성했지만 미숙함과 무질서가 잦았다. 특히 방언의 남용이 문제였다. 바울은 27절에서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 차례를 따라, 한 사람이 통역하라”고 구체적으로 규정한다. 이 지침은 당시 모임이 얼마나 뜨겁고 역동적이었는지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당시 교회는 가정교회 형태가 많았고, 사도나 상주 목회자가 늘 함께한 것도 아니었으며, 신약 성경이 아직 정경으로 묶이지도 않았다. 자유로운 구조 속에서 성령의 역사는 폭발적으로 일어났고, 그만큼 정밀한 분별과 공적 질서가 요구되었다. 그래서 29절에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하라”는 원칙이, 30절에는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하라”는 절제가 이어진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에서 초대교회의 성숙한 상호성이 보인다고 말한다. 성령의 은사는 내가 받은 능력을 증명하는 마당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실 공간을 서로 비워 드리는 자리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하되(12:31), 그 은사는 더 깊이 사랑하고 더 넓게 위로하며 더 견고히 세우기 위한 도구여야 한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요 화평의 하나님이시다”(33절)는 선언은 바로 이 균형의 정점에 놓인다. 성령 충만은 소란이 아니라 평화 속에서 발휘되는 생명력이다.

이 지점에서 장재형 목사는 교회 사역이 본질적으로 ‘예언자’를 따라 움직인다는 통찰을 덧붙인다. 예언자는 미래를 점치는 점술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미리 받아 공동체에 전하는 입이다. 안디옥 교회가 선교의 전초기지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선지자들과 교사들”(행 13:1)이 있었다. 사도적 리더십, 예언의 통찰, 교사의 분별, 집사의 봉사가 유기적으로 맞물릴 때 교회는 방향과 동력을 얻는다. 주목할 것은 초대교회에서 예언의 은사가 여성들에게 자주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사도행전 21장 9절은 빌립의 네 딸이 모두 예언했다고 증언한다. 이 배경 없이 14:34의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구절을 읽으면 오해하기 쉽다. 장재형 목사는 이 구절이 여성의 발언권이나 사역 자체를 금하는 보편 규범이 아니라, 고린도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공예배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규정이라고 해석한다. 유대 회당 전통에서는 여성이 남성과 함께 동등하게 참여하기 어려웠다. 반면 복음은 갈라디아서 3:28과 에베소서 2:14–16이 선포하듯, 사람 사이의 담을 허물어 공동체 안에 새로운 평등을 가져왔다. 해방의 첫 세대는 언제나 자유를 배우는 과정을 지난다. 성령의 분출을 절제하지 못해 공적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이 실제로 있었을 수 있고, 바울의 “잠잠하라”는 명령은 권리 박탈이 아니라 예배를 지키기 위한 목회적 처방이었다. 36절의 날 선 질문—“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는 자기 계시를 절대화해 공동체 위에 서려는 교만을 겨냥한다. 바울이 꺾고자 한 것은 성별이 아니라 무질서와 독선이었다.

여성 안수 문제도 이 연장선에서 조명된다. 장재형 목사는 여성들이 성령의 은사, 특히 예언으로 교회를 세우는 데 크게 쓰임받았음을 강조하며, 실제 목회 현장에서 여성에게 안수를 주기 위해 교단의 울타리를 넘어선 경험을 회상한다. 이는 시대정신이나 이념의 산물이 아니라, 본문이 요청하는 목회적 적용이다. 예레미야 31:22의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는 새 언약의 이미지는 하나님이 새 시대에 여성의 주도적 섬김으로 공동체를 세우신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물론 모든 리더십은 질서 안에서, 공적 검증 속에서, 덕을 세우는 방향으로 행사되어야 한다. 미국의 가장 큰 개신교 교단 가운데 하나인 남침례회(SBC)가 여전히 여성 목사 안수를 반대하는 데 이 구절을 근거로 삼아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바울의 의도는 억압이 아니라 보호, 차별이 아니라 건축이었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소명이 분명하고 공동체의 인준 속에서 검증되었다면, 성별은 제한이 될 수 없다. ‘잠잠’은 침묵 강요가 아니라 공예배를 보호하는 사랑의 절도다.

예언의 분별 문제를 다루면서 장재형 목사는 사도행전 21장의 아가보를 예로 든다. 아가보는 성령 안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될 것을 예언했다. 바울은 그 예언을 무시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예언의 진실성을 인정했으나, 더 큰 소명—복음이 예루살렘과 로마에까지 증거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후 전개는 하나님의 기묘한 인도를 드러낸다. 바울이 잡힐 때마다 로마군의 보호를 받았고, 암살 위협 속에서도 법정과 호송 체계를 통해 안전하게 이동하여 마침내 로마에 이르렀다. 장재형 목사의 해석은 분명하다. 예언은 곧장 복종해야 하는 절대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한 중요한 재료다. 어떤 때는 예언이 경고한 위험을 피하는 것이 하나님의 길이지만, 또 어떤 때는 그 위험을 통과해 더 큰 뜻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예언을 멸시하지 말되 분별하고(살전 5:20–21), 교사의 가르침으로 균형을 잡으며, 사도의 리더십 아래 질서 있게 순종하고, 서로를 경청하는 영적 문화를 길러야 한다. 이 문화가 바로 ‘덕을 세우는 교회’의 핵심이다.

공예배에서의 방언과 통역에 관한 바울의 세밀한 지침도 여전히 유효하다. 장재형 목사는 통역이 동반된 방언이 공동체 전체에 교훈과 위로를 준다고 설명한다. 통역 없는 방언은 개인의 경건에는 유익할지라도 공동체를 세우지는 못한다. 그래서 바울은 공적 자리에서는 통역을 요구하고, 통역이 없으면 잠잠하라고 한다. 반대로 예언은 직접적으로 공동체 유익을 낳지만, 여기에도 무제한의 발언권은 없다. “둘이나 셋”의 질서, “분별”의 절차, “잠잠하라”는 절제는 예언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장재형 목사는 방언과 예언을 경쟁 구도가 아닌 상보 구도로 읽는다. 방언은 개인의 심령을 깨우고, 예언은 공동체의 건축을 이끈다. 두 은사는 사랑의 길(고전 13장) 위에서 만날 때, 교회는 경건의 능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혼돈을 피한다.

오늘의 교회가 맞닥뜨린 현실적 과제는 생명력을 잃지 않으면서 질서를 잃지 않는 것이다. 제도와 형식은 안전망이 될 수 있지만, 성령의 활력을 가두는 벽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통제 없는 자유는 은사를 과시하는 무대로 전락해 분열을 낳는다. 장재형 목사는 초대교회로의 건강한 복원을 제안한다. 성령의 은사를 적극 사모하되, 모든 은사의 사용은 공동체가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명료하고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하며, 무엇보다 사랑을 ‘가장 좋은 길’로 삼아야 한다. 이때 남성과 여성이 함께 서서, 사도적 리더십과 예언적 통찰, 교사의 분별과 집사의 봉사가 한 몸처럼 움직인다. 빌립의 딸들처럼 예언하는 여성들이 교회를 세우고, 아가보처럼 앞길의 위험을 경고하는 예언이 공동체를 깨우며, 교사들이 말씀의 등불을 밝혀 분별의 기준을 제공하고, 봉사자들이 질서를 든든히 받쳐 준다. 이런 유기적 협력은 특정 교단의 승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성령의 선물, 말씀의 규범, 겸손한 순종이 빚어내는 열매다.

무엇보다 본문 끝자락의 결론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39–40절). 이 두 문장은 14장의 황금률이다. 예언을 사모하되 방언을 금하지 말라—금지의 신학이 아니라 열림의 신학이다. 동시에 모든 것을 적당하게, 질서대로 하라—무절제의 신학이 아니라 건축의 신학이다. 여기서 ‘적당하게’는 타협이 아니라 합당함, 곧 공동체의 유익과 외인에 대한 증거를 함께 고려한 분별을 뜻한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이 균형을 회복할 때, 세상은 다시 교회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 말한다. 불신자도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복음이 설명되고, 예언의 빛이 각 사람의 심중을 비추며, 방언과 기도가 개인을 새롭게 하고, 모든 것이 사랑의 줄 안에서 정돈될 때 사람들은 고백할 것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구절로 여성의 사역을 막는 벽을 세우기보다는, 그 구절을 통해 공예배의 질서와 분별의 필요를 배우고 그 질서 안에서 남녀가 함께 은사로 교회를 세우는 길을 열어야 한다. 여성 안수 문제 역시 같은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이 분명히 주신 은사와 소명이 공동체의 인준 속에서 확인되었다면, 성별은 제한이 될 수 없다. 물론 리더십은 권리일수록 무게가 커지기에 더 큰 겸손과 순종으로 섬겨야 한다. 그러나 그 겸손은 억압의 침묵이 아니라 사랑으로 자발적으로 선택한 절제다. 결국 고린도전서 14장은 억압과 금지를 위한 텍스트가 아니라, 성령의 활력과 교회의 질서를 결혼시키는 지혜의 장이다. 교회는 다시 오이코도메의 현장, 곧 건축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 성령의 불과 말씀의 등불, 사랑의 줄자와 겸손의 수평기, 분별의 저울이 함께 일할 때, 우리는 25절의 약속—불신자의 심중이 드러나고, 그가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고 증언하는 장면—이 오늘의 예배 한복판에서 다시 실현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장재형 목사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길어 올린 복음의 길이며, 오늘의 사역자와 교회가 붙들어야 할 주의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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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Jang – La parabole du riche et de Lazare


1. La vie terrestre qui détermine la vie éternelle

Parmi les deux paraboles rapportées dans Luc 16, celle de l’intendant infidèle qui figure au début et celle du riche et de Lazare qui suit sont étroitement liées. Si l’on s’intéresse de près à l’enseignement dans leur continuité, on découvre comment Jésus veut nous orienter quant à la direction et à l’attitude de notre vie sur cette terre. En particulier, ce récit nous invite à méditer sérieusement sur « l’importance d’une vie animée par l’amour et la compassion », tout en nous rappelant « l’existence de deux mondes (celui d’ici-bas et celui de l’au-delà) ». Le pasteur David Jang, à travers plusieurs prédications, a souvent souligné que, durant notre existence terrestre, nous devons agir avec sagesse selon le cœur de Dieu, et faire preuve de bienveillance et d’amour envers les pauvres et les faibles, conformément à la volonté divine.

Jetons d’abord un bref coup d’œil à la parabole de l’intendant infidèle (Luc 16:1-9). Le maître apprend que son intendant gaspille ses biens et le convoque. Se sentant menacé pour son avenir, cet intendant réduit les dettes des créanciers de son maître et s’attire ainsi leur bonne grâce. À première vue, il use indéniablement d’un stratagème malhonnête pour réajuster les comptes financiers. Pourtant, le maître fait l’éloge de son habileté. Il existe diverses interprétations de cette parabole, mais l’un des points essentiels que Jésus souligne à travers ce récit est « la manière dont nous utilisons les biens qui nous sont confiés sur cette terre ». Plus que la seule question de la possession de biens, l’Évangile montre qu’il est sage de partager et de donner à autrui ce que Dieu nous accorde. La Bible nous rappelle sans cesse que tout ce que nous possédons appartient en définitive à Dieu et que nous ne sommes que des intendants (ou des gérants) de ces biens. L’image de l’intendant qui, malgré les moyens discutablement employés, ne rate pas « l’occasion limitée » qui lui est donnée pour l’exploiter sagement, nous enseigne, nous aussi, à faire bon usage de l’« opportunité », du « temps » et des « ressources matérielles » que Dieu nous accorde sur cette terre, afin d’aider les pauvres et ceux qui sont dans le besoin.

Juste après cette parabole, celle du riche et de Lazare est présentée (Luc 16:19-31). Il ne s’agit pas de deux récits distincts sans lien, mais bien d’un seul et même message dans le prolongement de la question : « En tant que personne aisée ou membre du peuple de Dieu, quelle attitude devons-nous avoir dans ce monde ? » Le riche est dépeint comme vêtu de pourpre et de fin lin, festoyant somptueusement chaque jour. À l’opposé, le mendiant Lazare, couvert d’ulcères, tente de survivre avec les miettes qui tombent de la table du riche. Les chiens viennent même lécher ses plaies, signe de son extrême misère. Ainsi, ces deux hommes vivent dans des conditions complètement opposées, puis, tous deux finissent par mourir. À partir de là, survient un surprenant renversement de situation : Lazare est emporté dans le sein d’Abraham (figure du paradis), tandis que le riche tombe dans l’hadès (l’enfer), où il subit de terribles souffrances.

Cette parabole montre l’existence de « deux mondes » : la vie présente et celle de l’au-delà (après la mort). Jésus enseigne sans cesse aux gens à considérer leur vie actuelle selon la perspective de l’éternité. La vie terrestre que nous voyons et expérimentons n’est pas tout ; il existe un monde éternel qui se prolonge après la mort. C’est là un enseignement majeur du christianisme : l’Écriture insiste à maintes reprises sur le fait que la manière dont nous vivons présentement a un impact sur la vie de l’autre côté. Hébreux 9:27 déclare : « Il est réservé aux hommes de mourir une seule fois, après quoi vient le jugement. » Dans l’Ecclésiaste 12, on rappelle : « Avant que la poussière retourne à la terre, le souffle retourne à Dieu qui l’a donné ; souviens-toi de ton Créateur. » Le pasteur David Jang répète souvent dans ses prédications : « Si nous nous focalisons uniquement sur ce qui est visible, nous risquons de passer à côté de l’essentiel qui est éternel. » Il insiste ainsi : « Les croyants doivent espérer le Ciel et, par leur vie terrestre, porter des fruits dignes de l’éternité. »

Par ailleurs, l’histoire du riche et de Lazare est un sérieux avertissement pour ceux qui se considèrent comme appartenant au peuple de Dieu. Bien que le riche ait vécu dans le luxe et l’abondance, après sa mort, il se retrouve dans la souffrance au séjour des morts. On s’interroge : « Pourquoi ce riche est-il allé en enfer ? Cette parabole sous-entend-elle que seuls les pauvres vont au paradis ? » Evidemment, l’Écriture ne dit pas que les pauvres vont forcément au ciel et que les riches vont automatiquement en enfer. Job était un homme de grande foi et de grands biens, tout comme Abraham. Aucun des deux n’a fini en enfer pour avoir péché contre Dieu. Ainsi, l’enjeu n’est pas la richesse en elle-même, mais plutôt l’attitude et l’état du cœur vis-à-vis de cette richesse, et surtout la question de savoir si nous pratiquons ou non la « générosité et l’amour », selon la responsabilité qui nous est confiée.

Dans Luc 16, il est mis en avant que « le riche n’a prêté aucune attention au pauvre Lazare, qui se trouvait à sa porte ». L’écart entre eux était très faible géographiquement : Lazare était déjà là, devant la porte du riche. Pourtant, le riche ne tenait pas compte de lui, occupé uniquement à se revêtir d’habits somptueux et à profiter de festins luxueux. L’attitude de ce riche illustre bien la mentalité d’un croyant jouissant abondamment de la grâce de Dieu et de Sa Parole, mais refusant de partager cette bénédiction — une forme d’« égocentrisme spirituel ». Dans ce sens, le « mendiant Lazare » est souvent interprété comme symbolisant ceux qui ont faim spirituellement, qui ont soif de la Parole, ou qui sont dans un besoin matériel ou moral urgent. Le pasteur David Jang enseigne régulièrement que lorsqu’un croyant parvient à une certaine prospérité (qu’elle soit matérielle ou liée à la Parole), il doit absolument passer à la phase du « partage et du service ». L’histoire tragique du riche qui ignore Lazare montre clairement combien il est vain et effrayant, face au jugement final, de n’avoir vécu que pour se régaler égoïstement des bénédictions et des dons reçus.

Après sa mort, Lazare est « emporté par les anges dans le sein d’Abraham ». C’est une expression que les Juifs utilisent volontiers pour décrire « l’état de béatitude suprême », ou l’équivalent du « paradis ». Inversement, le riche « lève les yeux, en proie à des tourments dans le séjour des morts », et aperçoit Abraham et Lazare. Il lance alors cet appel : « Père Abraham, envoie Lazare pour qu’il trempe le bout de son doigt dans l’eau et rafraîchisse ma langue, afin de soulager ma douleur. Et supplie-le de venir prévenir mes frères, pour qu’ils ne tombent pas, eux aussi, dans ce lieu de tourments. » Abraham répond de façon catégorique : « Ils ont Moïse et les prophètes ; qu’ils les écoutent. » Autrement dit, toute la révélation est déjà contenue dans l’Ancien Testament (la Loi de Moïse et les livres prophétiques) : le Messie, le monde éternel, le chemin de la justice y sont annoncés. « S’ils n’écoutent pas la Parole, même si un mort ressuscite pour leur parler, ils ne croiront pas », conclut-il, mettant fin au récit.

Dans le Nouveau Testament, nous voyons qu’après la résurrection de Lazare (le frère de Marthe et Marie), nombre de témoins ont cru en Jésus et se sont mis à Le suivre, mais les principaux sacrificateurs et les pharisiens ont réagi en renforçant leurs plans pour tuer Jésus. C’est la preuve qu’un miracle ou un événement surnaturel ne conduit pas automatiquement au changement de cœur. Ceux qui sont prêts à croire en Dieu à travers les miracles y trouveront matière à croître dans la foi, mais ceux qui ont déjà un cœur endurci ne feront que s’endurcir davantage, même face à un miracle. Jésus enseigne que la vraie conversion naît « lorsqu’on écoute la Parole de tout son cœur, qu’on réalise son péché et qu’on se détourne de sa mauvaise voie ». En d’autres termes, il existe déjà suffisamment de « preuves scripturaires » pour le salut ; si on ne veut pas ouvrir son cœur à cette Parole, même des signes et des prodiges plus extraordinaires ne produiront pas le repentir.

En filigrane, ce passage évoque aussi le jugement à venir à la fin des temps et met l’accent sur la « lumière déjà donnée » dans la Parole. Jésus déclare : « Je suis le chemin, la vérité et la vie » (Jean 14:6) et assure à Ses disciples : « Je vais vous préparer une place, afin de vous ouvrir le chemin du ciel. Nous nous y retrouverons. » Pourtant, nombreux sont ceux qui, aujourd’hui encore, ne songent qu’à leur vie terrestre, négligeant la dimension de l’éternité. La parabole du riche et de Lazare ne se réduit pas au schéma simpliste : « le riche va en enfer et le pauvre au ciel ». Elle nous enseigne combien notre attitude pendant cette vie, et la pratique concrète de « la justice et de la miséricorde » attendues par Dieu, peuvent décider de notre sort final.

À cet égard, le pasteur David Jang souligne souvent que « ceux qui s’emploient à l’œuvre de Dieu – pasteurs, missionnaires, théologiens, responsables laïcs – sont tous des “riches” ». Cette richesse ne se limite pas aux biens matériels. Par exemple, si nous avons une abondance de ressources spirituelles : la Parole de Dieu, des ouvrages théologiques, la liberté de culte, la prédication et la communion fraternelle, alors nous sommes “spirituellement riches”. Or, si, semblables au riche, nous ignorons Lazare à notre porte, demeurant enfermés dans notre monde, satisfaits de jouir de la Parole et de la grâce pour nous seuls, nous pourrions bien courir le même sort que ce riche. Par conséquent, « nous devons impérativement transmettre et partager la grâce, la connaissance et la doctrine qui nous ont été confiées », avertissement qui s’adresse encore aux Églises et à chaque croyant aujourd’hui.

Si nous avons vraiment le cœur de Dieu, nous ne pouvons rester indifférents devant « Lazare » qui se tient là. Peut-être Lazare souffre-t-il de la faim, ou d’une soif spirituelle, ou d’une détresse quelconque ; les situations varient. Mais il est certain que des personnes dans le besoin se trouvent autour de nous, et c’est à nous d’aller vers elles. Jésus dit : « Ce que vous avez fait au plus petit de mes frères, c’est à moi que vous l’avez fait » (Matthieu 25). Dans la parabole des brebis et des boucs, Il enseigne que l’un des critères du jugement est « ce que nous avons fait lorsque les autres avaient faim, soif, ou qu’ils étaient nus et malades ». Ainsi, nous devons vérifier sincèrement si nous portons actuellement le cœur de Dieu ou si nous sommes centrés sur notre « table de festin ». C’est un examen essentiel.

Un autre aspect capital mis en relief par cette parabole est « qu’après la mort, il n’y a plus de possibilité de changement de destin ». Ce qui est lié sur terre sera lié au ciel, et ce qui est délié sur terre y sera délié (Matthieu 18). Abraham déclare : « Un grand abîme est fixé entre nous et vous ; ceux qui voudraient passer d’ici vers vous ou de là vers nous ne le pourraient pas. » Autrement dit, si l’on ne se repent pas et ne fait pas demi-tour sur cette terre, il est trop tard dans l’au-delà. On entend parfois : « On peut toujours se repentir juste avant de mourir. » Mais ce raisonnement est périlleux selon l’enseignement biblique, car nous ne savons ni le jour ni l’heure de notre mort, et nous pourrions passer à côté du moment opportun, ce qui mettrait en péril notre sort éternel.

Dès lors, l’Église doit sans cesse s’employer à « prêcher l’Évangile », car c’est un véritable acte d’amour. Puisque nous croyons à la réalité de l’au-delà et du jugement de Dieu, nous ne pouvons que dire à ceux qui ne croient pas : « Repentez-vous et croyez à la Bonne Nouvelle. » De même, entre croyants, nous devons nous encourager les uns les autres, instruire ceux qui découvrent la foi, leur transmettre la Parole, les aider à grandir spirituellement. Le pasteur David Jang a maintes fois insisté pour que l’Église ne se limite pas à l’autosatisfaction, mais qu’elle mette en pratique « l’enseignement et la mission » tels qu’ils sont attestés dans les Évangiles et les Actes. Parmi les instruments utiles, il y a notamment le « partage de livres (ouvrages chrétiens) ». Les Églises et facultés de théologie situées dans des régions spirituellement riches possèdent souvent un surplus de documents ; or, de nombreux endroits souffrent d’un manque criant de livres et de ressources. Leur envoyer ces richesses spirituelles, c’est offrir le pain de la Parole à ceux qui en manquent désespérément. On peut considérer cela comme « la version moderne du secours apporté à Lazare ».

La première grande leçon de la parabole du riche et de Lazare est : « Nous sommes tous des pèlerins sur la terre, et il existe un monde éternel après la mort ; ne l’oublions pas. » Toute la Bible, des Évangiles aux épîtres, martèle le message : « Il est réservé à l’homme de mourir et ensuite vient le jugement. Prépare-toi à l’éternité dans la vie présente. » Si nous examinons à quel point nous tombons facilement dans l’orgueil et la complaisance, nous comprenons la nécessité de ce rappel pour nos âmes. La deuxième leçon est : « Partageons ce qui nous est donné. » Il ne s’agit pas que des biens matériels : cela inclut la Parole, les dons spirituels, la connaissance, le talent. Si nous avons reçu une abondance quelconque de la part de Dieu, ne la gaspillons pas pour nous seuls, ni uniquement au sein de notre Église ou de notre groupe, mais penchons-nous sur Lazare, qui se trouve au dehors. Selon le pasteur David Jang, c’est là la « preuve de la vie évangélique » et le « signe extérieur de la vision du royaume des cieux » qui anime un croyant.

De plus, dans la parabole, le riche supplie : « envoie Lazare pour rafraîchir ma langue ». Dans l’épître de Jacques (Jacques 3), on apprend que « la langue est un feu, c’est le mal même, enflammé par la géhenne ». La langue est l’un des principaux instruments du péché. Quelle a pu être l’attitude du riche concernant sa « langue » sur la terre ? Peut-on supposer qu’il méprisait Lazare, qu’il déformait la volonté de Dieu, qu’il ne cessait de se vanter et de rechercher ses propres plaisirs ? Finalement, c’est dans l’au-delà qu’il fait la cruelle expérience d’une langue en feu. Que ce soit symbolique ou non, l’important est de saisir l’importance de la « langue » dans notre vie. Par nos paroles, nous pouvons relever ou détruire, consoler ou blesser, encourager ou juger. Le riche ne s’est jamais servi de sa langue pour manifester de l’amour envers Lazare ou pour ordonner qu’on lui vienne en aide. Réfléchissons donc à l’usage que nous faisons, nous, de notre langue. Est-ce que notre langue glorifie Dieu ?

D’autre part, à travers le récit du riche et de Lazare, nous confirmons à nouveau la justice de Dieu. Abraham dit au riche : « Toi, tu as reçu tes biens pendant ta vie, tandis que Lazare a eu des maux ; maintenant ici, lui, il est consolé, et toi, tu souffres » (Luc 16:25). On pourrait juger sommaire de qualifier cela de « justice » au premier degré, mais il est clair que Dieu agit selon une « logique » différente de celle du monde. Bien que la réalité terrestre puisse paraître injuste, Dieu prononce in fine Son jugement équitable. C’est parce que nous croyons en Sa justice finale que nous ne nous laissons pas abattre par les incohérences et l’iniquité de ce monde. « Vainquez le mal par le bien » (Romains 12:21), dit la Parole. Dans la perspective du jugement dernier et de la rémunération divine, celui qui vit comme Lazare peut garder espoir malgré l’épreuve, tandis que celui qui possède l’abondance, comme le riche, ne s’enorgueillit pas mais se remet en question et apprend à partager.

Lorsque le riche supplie Abraham : « Envoie Lazare avertir mes frères afin qu’ils ne viennent pas dans ce lieu de tourment », à première vue, il manifeste un semblant de bienveillance envers sa famille. Mais Abraham rétorque que « s’ils ne croient pas à Moïse et aux prophètes, même un mort ressuscité ne les convaincra pas ». Ce qui compte, ce n’est pas le miracle, mais la foi en la Parole. Aujourd’hui encore, beaucoup ne s’intéressent qu’aux miracles et phénomènes surnaturels, négligeant la prédication et l’enseignement bibliques. Pourtant, la foi véritable repose « non sur les signes, mais sur la Parole ». Dans l’Évangile de Jean, Jésus, à plusieurs reprises, exprime Sa peine : « Si vous ne voyez pas des miracles, vous ne croirez donc jamais » (Jean 4:48), et Il déclare que « ceux qui croient sans avoir vu les signes sont bénis » (cf. Jean 20:29). Le pasteur David Jang, lui aussi, souligne la nécessité d’une foi fondée sur la Parole plutôt que centrée sur les miracles. En effet, les miracles ne sont que provisoires et secondaires, tandis que la Parole est éternelle. Une foi bâtie sur la Parole demeure ferme même quand surviennent tempêtes et épreuves.

Nous n’avons pas à attendre qu’un « mort ressuscité » vienne nous parler ; la « Bible » est déjà à notre portée. Nous devons l’ouvrir, lire et obéir au message du salut qui s’y trouve. C’est la seule façon de passer de ce monde au monde éternel — c’est cela, la mise en pratique de la « sagesse de l’intendant ». Cela signifie desserrer les liens qui nous retiennent sur cette terre : attachement aux biens matériels, ambition égoïste, haine, jugement d’autrui… et au contraire « lier » en nous l’amour, le partage, l’humilité, conformément à la vision du royaume des cieux. Dès lors que nous menons une telle vie, le royaume de Dieu commence déjà à se manifester en partie sur cette terre. Et ceux qui préparent ainsi l’avènement du royaume de Dieu ici-bas recevront une pleine récompense dans ce royaume, après la mort. Tel est le message central de la parabole du riche et de Lazare.

Il nous reste maintenant à passer de la compréhension intellectuelle à la mise en pratique concrète. Si nous disposons de l’aisance matérielle, demandons-nous si nous avons l’intention de la partager avec les « Lazare » autour de nous. Si nous pensons être riches spirituellement ou théologiquement, partageons-nous ce savoir pour instruire et édifier d’autres personnes ? Si nous sommes, au contraire, dans la situation de Lazare, vivant dans la pauvreté et la souffrance, au lieu de nous lamenter, demandons-nous pourquoi Dieu nous fait traverser cette épreuve, et ce qu’Il veut nous enseigner. Quoi qu’il en soit, la Bible promet à ceux qui restent humbles et fidèles en dépit de l’adversité terrestre une « bénédiction céleste ». Car Dieu est juste et, au jour du jugement, Il rendra selon Sa justice.

Le pasteur David Jang rappelle souvent dans ses prédications que « Dieu n’oublie jamais le travail fourni pour Lui. » « Même un verre d’eau fraîche offert par amour sera récompensé, a fortiori tout effort consenti pour sauver les âmes, épauler autrui par la Parole, ou contribuer financièrement à l’œuvre de Dieu. Même si vous ne recevez pas de salaire sur cette terre, dans le ciel rien ne sera vain », insiste-t-il. Une telle conviction nous pousse à soutenir avec zèle l’œuvre missionnaire, les actions caritatives, l’éducation, etc. Ainsi, le « ministère du Bookstore » en est un exemple concret : un simple livre chrétien peut représenter une porte de salut pour une personne en quête spirituelle. Dans les communautés déjà bénies par l’abondance de l’Évangile, le fait de « collecter et de trier des livres pour les envoyer » à ceux qui manquent de ressources spirituelles est un effort qui bâtit un trésor dans les cieux.

La parabole du riche et de Lazare nous rappelle en premier lieu (1) l’existence d’un monde éternel (le jugement, le paradis et l’enfer) et le fait que notre vie présente influe sur cette destinée à venir. (2) Deuxièmement, si nous sommes devenus riches (que ce soit spirituellement ou matériellement), nous devons impérativement partager et donner. De la richesse financière aux connaissances bibliques, en passant par les responsabilités ecclésiales et les talents, toutes les formes de « richesses » doivent servir. Si nous nous enfermons dans l’autosatisfaction, nous courons le risque de suivre le même chemin que le riche. (3) Ce thème rejoint directement l’enseignement de la parabole de l’intendant infidèle, que Jésus fait précéder : « Ne vous illusionnez pas en croyant que c’est à vous ; utilisez-le pour les pauvres et ceux qui sont démunis. »

La scène finale, où le riche supplie qu’on envoie Lazare pour avertir ses frères, montre de manière poignante qu’« après la mort, on ne peut plus rien faire ». C’est « maintenant » que nous devons annoncer l’Évangile aux êtres que nous aimons : famille, proches, amis. Après la mort, il n’y a plus de pont entre ici-bas et l’au-delà. Les vivants, quant à eux, ont déjà en abondance « Moïse et les prophètes », l’Ancien Testament, la révélation du Nouveau Testament, d’innombrables sermons et enseignements de l’Église : la « lumière » est déjà plus que suffisante. Ce n’est pas par manque de preuves que certains ne croient pas, mais à cause de l’endurcissement du cœur. Même après la résurrection de Jésus, les chefs religieux juifs sont restés dans l’incrédulité. Les soldats romains, constatant le tombeau vide, ont été soudoyés pour propager le faux témoignage selon lequel « les disciples ont volé le corps de Jésus ». Le problème n’est pas l’insuffisance de miracles, mais la dureté du cœur.

Par conséquent, nous ne pouvons dire : « Montre-moi un signe plus évident, et je croirai. » Nous devons reconnaître que « la Parole révélée est déjà amplement suffisante », l’accueillir dans nos cœurs et nous repentir, pour manifester notre foi par l’amour. Parmi les versets que le pasteur David Jang cite souvent, on trouve Romains 10:8-9 : « La Parole est près de toi, dans ta bouche et dans ton cœur. » Autrement dit, la Parole de Dieu est déjà à notre portée et, si nous ouvrons notre cœur et nos lèvres, n’importe qui peut parvenir au salut. Les sauvés, unissant leurs forces, doivent alors se soucier des « Lazare » qui ignorent encore la Parole ou languissent dans une pauvreté spirituelle. Voilà la mission de l’Église.

Les deux paraboles de Luc 16 (l’intendant infidèle et le riche et Lazare) portent toutes deux sur « la voie de la sagesse dans la vie ». Quiconque a reçu quelque chose à gérer dans ce monde — biens, talents, grâces — sera un jour appelé à rendre compte. De plus, la vie terrestre n’est pas la totalité de l’existence : chaque décision et chaque action influencent l’éternité. C’est dans ce contexte que Jésus répète l’importance de « partager », avertissant sévèrement par l’exemple du riche : « Ne néglige pas Lazare, qui est à ta porte. » Avons-nous déjà tendu la main aux nombreux « Lazare » autour de nous, ceux à qui nous pouvons accéder en ouvrant seulement notre porte ? Sommes-nous prêts à leur apporter une aide concrète ? Si personne ne se soucie de Lazare malgré cet enseignement, si nous laissons passer cette leçon sans y répondre, nous risquons de connaître le même sort que le riche, c’est-à-dire le tourment de l’au-delà.

Il apparaît clairement que le message de Luc 16 ne se limitait pas aux Juifs d’il y a deux mille ans. Il concerne aussi l’Église et les croyants d’aujourd’hui, qu’ils soient riches ou pauvres. Puisque nous croyons en l’éternité et au jugement de Dieu, notre regard sur le présent doit être différent de celui de ceux qui ne voient que ce monde. Notre mode de vie doit refléter d’autres valeurs. Ce n’est pas notre corps (qui retournera à la poussière) qui importe, mais notre âme, qui se tiendra devant Dieu pour l’éternité. Par conséquent, ceux qui bénéficient de ressources financières ou d’abondance spirituelle doivent se demander : « Comment les partager ? » C’est le sujet le plus urgent et le plus essentiel à régler durant notre vie terrestre. Jésus, à travers Ses paraboles, veut frapper nos consciences.

Dans ses sermons sur Luc 16, le pasteur David Jang affirme : « Celui qui porte sur le monde le regard du ciel perçoit nécessairement la détresse de son prochain. » Le cœur de Dieu est toujours tourné vers chaque âme, et celui qui épouse ce cœur ne peut pas rester les yeux fermés face à la souffrance autour de lui. Si nous sommes incapables de voir le « Lazare » tout près, c’est peut-être que nous sombrons déjà dans l’orgueil spirituel ou l’insensibilité. Il est temps de nous repentir. Le riche, qu’il l’ait voulu ou non, a dû affronter après sa mort une situation irréversible. Mais nous, tant que nous respirons, nous pouvons encore aider ceux qui sont dans le besoin, annoncer l’Évangile, servir les uns et les autres. Il nous reste un « sursis ». Ce temps est limité et finira un jour. Ainsi, la parabole du riche et de Lazare constitue à la fois un avertissement sévère et une occasion de saisir la grâce pour le temps qu’il nous reste.


2. La responsabilité du riche et l’espérance de Lazare

Si l’on interprète plus largement la parabole du riche et de Lazare, on peut y lire non seulement l’opposition entre un riche matériel et un pauvre démuni, mais aussi celle entre « ceux qui possèdent une grande richesse spirituelle et biblique » et « ceux qui, faute de la recevoir, meurent de faim spirituellement ». Aujourd’hui encore, l’Église et les croyants se situent-ils à ce niveau ? Dans le monde, on observe clairement la coexistence d’« un riche » et d’« un Lazare ». D’un côté, on jouit d’une abondance de la Parole, d’innombrables ouvrages chrétiens, de multiples séminaires et conférences procurant une nourriture spirituelle surabondante ; de l’autre, certains régions peinent à se procurer ne serait-ce qu’une seule Bible, et languissent dans la disette spirituelle. Dans une grande Église de centre-ville résonnent de puissants chants de louange et s’organisent de grands programmes, tandis qu’à la périphérie ou à la campagne, voire dans certains pays pauvres, l’Évangile n’a pas encore atteint bien des lieux.

Face à cette réalité, le pasteur David Jang rappelle : « Nous sommes nous-mêmes des “riches spirituels”, et si nous n’aidons pas les “Lazare spirituels”, c’est un problème grave. » Par exemple, dans l’action missionnaire ou l’œuvre de la littérature chrétienne, il arrive souvent que des bibliothèques entières regorgent de livres dans le monde anglophone ou occidental, et que ces trésors soient jetés ou bradés sans avoir servi à quiconque. Pendant ce temps, en Inde, en Afrique ou en Asie du Sud-Est, bien des établissements de théologie n’ont pas assez de livres pour permettre aux étudiants de travailler sérieusement. Ce décalage ne se limite pas à la question des livres, mais s’étend aux domaines matériels, financiers, éducatifs, médicaux, sociaux… bref, la parabole du riche et de Lazare se vérifie sous bien des angles.

Selon le principe biblique, Dieu agit au travers des hommes et de l’Église, répand

ant Son amour par ce canal. Jésus a souligné l’importance d’aider les pauvres, de secourir les prisonniers, de soigner les malades. Matthieu 25, avec la parabole des brebis et des boucs, résume l’essentiel : « Ce que vous avez fait au plus petit de mes frères, c’est à moi que vous l’avez fait. » Ce texte illustre de manière frappante la mise en pratique de la parabole du riche et de Lazare. Pour les uns, c’est un « petit » partage, mais pour d’autres, c’est un secours vital. La Bible ajoute que secourir les autres, c’est comme agir directement envers Jésus.

Cependant, il ne faut pas aborder le « partage » dans un esprit de charité condescendante : « J’offre un peu de ce que j’ai à celui qui n’a rien. » La véritable entraide, animée par le cœur de Dieu, cherche la restauration intégrale de la personne : « Comment permettre à l’autre de se relever complètement ? » Il ne s’agit pas de distribuer de l’aide ponctuelle, mais de transmettre l’Évangile, de faire des disciples, de favoriser l’autonomie, bref, d’offrir un accompagnement plus profond. C’est cela « sauver les âmes et étendre réellement le royaume de Dieu ». L’Église doit donc associer prière, engagement pratique et formation de personnes capables de se multiplier. Ce que le riche a négligé à l’égard de Lazare, c’est précisément la conscience qu’il avait « la responsabilité spirituelle et matérielle de s’occuper de son prochain ». S’il l’avait compris, il se serait employé non seulement à lui jeter quelques miettes, mais à identifier et soigner la cause profonde de la souffrance de Lazare (la maladie, la faim).

Aujourd’hui, nombre de voix s’élèvent pour souligner que, dans les œuvres de mission et de charité, il faut privilégier une approche à long terme, plutôt qu’une assistance ponctuelle. Les campagnes d’aide rapide ou de mission de courte durée peuvent être un bon début, mais l’objectif doit être que les populations locales reçoivent et assimilent la Parole, qu’elles fondent elles-mêmes leurs communautés ecclésiales, deviennent autonomes, et à leur tour annoncent l’Évangile. Voilà la « sagesse de l’intendant » et l’esprit de la « grande mission » de Jésus (Matthieu 28). Le pasteur David Jang l’a expliqué de multiples manières : « L’expansion du royaume de Dieu n’est pas qu’une extension du nombre de fidèles ; c’est annoncer fidèlement la Parole de Jésus-Christ, voir les croyants transformés et devenir eux-mêmes serviteurs pour d’autres. » Dans ce cadre, la diffusion de livres et de matériels pédagogiques, la présence de formateurs et d’enseignants, sont autant d’éléments nécessaires.

Pourquoi Jésus a-t-Il choisi un exemple aussi extrême (un riche dans l’opulence et un mendiant misérable) ? Pour frapper fortement les esprits et mettre en évidence l’une des erreurs les plus courantes de l’homme : « vivre comme si la situation présente allait durer éternellement ». Le riche croit que sa fortune et sa position sont acquises, refuse d’assumer la moindre responsabilité spirituelle, et finit par ignorer la volonté de Dieu. Pourtant, ni l’argent, ni le rang social ne peuvent nous sauver de la mort. Au contraire, selon la façon dont on a utilisé ces biens pour soi-même ou pour autrui, le verdict peut changer radicalement devant le tribunal divin. Le pasteur David Jang avertit : « Plus on a reçu sur cette terre, plus on devra rendre compte devant Dieu sur la manière dont on a partagé. » Il encourage vivement « une vie de générosité, d’ouverture, d’élargissement de notre bien-être au profit d’autrui ».

Le défi que la parabole du riche et de Lazare nous lance n’est pas seulement lié à la crainte de l’enfer et à l’espérance du paradis. Il s’agit surtout de répondre à la question : « Lorsque nous sommes spirituellement (ou matériellement) riches, comment vivons-nous concrètement l’amour de Jésus envers les pauvres et les nécessiteux ? » Depuis l’époque des Pères de l’Église, on rappelle que « l’amour et la miséricorde » ne sont pas de vagues idéaux, mais des valeurs à appliquer dans la vie quotidienne et sur le terrain de la mission. Un morceau de pain, un vieux vêtement, peuvent être vitaux pour une personne dans la misère ; plus encore, un Évangile, un livre biblique, peuvent bouleverser à jamais son destin spirituel. « L’amour s’exprime par des actes », dit-on souvent, et c’est là l’essence de l’enseignement de Jésus.

Par ailleurs, la prise de conscience de « l’existence de deux mondes (celui d’ici-bas et celui de l’au-delà) » modifie en profondeur notre vision de l’existence. Si la mort était la fin de tout, l’homme chercherait naturellement le plaisir et l’intérêt immédiats. Mais l’Évangile affirme qu’il y a une vie éternelle, un jugement devant Dieu, ce qui suscite la crainte ou la révérence, et nous conduit à réviser notre comportement aujourd’hui. Ce n’est pas qu’une question d’éthique ou de philosophie, mais de foi : « Voyez plus loin que les satisfactions terrestres, fixez vos regards sur la joie du ciel », répète le pasteur David Jang. Sans cette perspective, nous risquons fort de terminer comme le riche, suppliant qu’on nous offre une goutte d’eau pour rafraîchir notre langue, tandis que nous brûlerons dans l’éternité.

De ce fait, la parabole nous livre sa conclusion ultime, qu’on peut résumer ainsi :

  1. La vie sur terre est éphémère, et après la mort vient le jugement.
  2. Celui qui ignore le pauvre et le faible, comme le riche l’a fait avec Lazare, se détourne du cœur de Dieu, et s’expose à un blâme sévère.
  3. Les « Écritures » (Moïse, les prophètes, les Évangiles, les épîtres) sont déjà largement suffisantes comme témoignage ; il n’y a donc pas d’excuse pour l’incrédulité.
  4. La vraie conversion et le service naissent de l’écoute et de l’obéissance à la Parole.
  5. On ne peut plus changer de destinée après la mort. C’est pourquoi la décision nous concerne « maintenant ».
  6. La « richesse du croyant » englobe non seulement l’argent, mais aussi l’abondance spirituelle, théologique, intellectuelle. Cela doit être utilisé pour l’avancement du royaume de Dieu.
  7. Enfin, comme le prône le pasteur David Jang et bien d’autres, la mise en place d’initiatives de partage (telles que le « Bookstore Ministry ») pour soutenir les « Lazare » dans le monde entier est un geste concret de l’Évangile.

L’histoire du riche et de Lazare nous rappelle à quel point notre réalité « touche l’éternité ». Elle nous pousse à vérifier nos actes et nos intentions devant Dieu. Si nos richesses, nos connaissances ou notre énergie sont uniquement consacrées à notre satisfaction, elles deviendront un fardeau le jour du jugement. Mais si nous nous en servons pour secourir les Lazare et manifester le cœur de Dieu, alors nous « amassons un trésor dans le ciel ». La vie de foi ne se limite pas à la fréquentation du culte : c’est « vivre au quotidien en tenant compte de l’éternité » selon l’éthique du royaume de Dieu. Au cœur de cette éthique, on trouve la parole du Seigneur : « Vous avez reçu gratuitement, donnez gratuitement » (Matthieu 10:8).

Les multiples questions auxquelles nous sommes confrontés ici-bas — « Quel est le but de ma vie ? », « Quelles sont mes valeurs ? », « Quel métier exercer ? », « Comment employer mes biens ? », « Comment utiliser mon temps et mes compétences ? » — sont toutes liées au message de cette parabole. Suivons-nous l’exemple du riche, qui n’a cherché que son confort terrestre, ou celui de Lazare, qui, malgré la souffrance, a mis son espérance en Dieu ? Ou encore, si nous sommes dans la position du riche, quels efforts faisons-nous pour aider le Lazare à notre porte ? Nous devons nous interroger chaque jour et ne pas remettre à plus tard. Car nous savons que la vie a une fin, et que l’au-delà est réel. « Aujourd’hui » est précieux. À la fin de notre pèlerinage terrestre, serons-nous conduits dans le sein d’Abraham, ou dans la flamme où nous supplierons qu’on rafraîchisse notre langue ? Voilà toute la gravité de Luc 16.

Ainsi, la parabole du riche et de Lazare illustre la vision du « royaume de Dieu » et exhorte à une vie d’amour et de partage. Le fait qu’elle soit précédée de la parabole de « l’intendant infidèle » dans Luc 16 renforce l’injonction de Jésus : « Utilisez, dans la perspective du royaume, tout ce qui vous est confié (biens, dons, connaissances). » Si l’intendant, malgré des méthodes douteuses, a été félicité pour avoir su tirer profit de l’occasion qui lui était donnée, à plus forte raison les enfants de Dieu devraient-ils déployer toute leur énergie pour « secourir les démunis, proclamer l’Évangile, partager la grâce et la bénédiction ». C’est cette « sagesse céleste » que Jésus enseigne, et que le pasteur David Jang et d’autres prédicateurs ne cessent d’appeler l’Église à pratiquer.

Luc 16 délivre un enseignement rempli de la voix du Seigneur : « Si tu jouis d’une prospérité en ce monde, fais-en usage pour aimer comme ton Père céleste. Il t’en louera pour ta sagesse. » Au fond, tout se résume à l’amour, la compassion et l’espérance du ciel. Souvenons-nous des multiples facettes de cette parabole et mettons-les en pratique là où nous sommes (dans notre famille, notre travail, notre Église, ou sur le champ missionnaire). Le Seigneur nous demandera : « Qu’as-tu fait des grâces que Je t’ai accordées ? Qu’as-tu fait pour le “Lazare” à ta porte ? » Pour ne pas rougir devant cette question, tournons-nous dès maintenant vers notre Lazare. Voilà l’appel qui ressort de la lecture de Luc 16, et l’exhortation que le pasteur David Jang répète inlassablement : celle d’« appliquer concrètement l’Évangi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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