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 속에 피어난 복음 – 장재형목사

장재형목사

장재형목사가 사도행전 8장 1–5절을 중심으로 한 설교·강의를 토대로 본문이 말하고 있는 초대교회의 역사와 복음 전파, 그리고 그 정신을 현대 교회가 어떻게 이어받아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신학적·실천적 고찰을 담았다. 또한 장재형목사가 강조해온 ‘참된 복음’과 ‘역사를 꿰뚫는 하나님 나라’의 시각을 중심으로, 환란 속에서도 진전하는 복음의 능력과 교회의 새 시대적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초대교회의 핍박, 흩어짐, 그리고 복음의 확장

사도행전 8장 1–5절은 초대교회가 겪은 극심한 박해와 그로 인해 교회가 흩어지는 장면을 증언한다. 특히 사도행전 7장에서 돌에 맞아 순교한 스데반의 죽음 이후, 교회 공동체에 대한 대대적 탄압이 시작되었다. 스데반이 죽자마자 많은 성도들이 심한 두려움을 느꼈고, 예루살렘 교회를 대상으로 한 핍박이 가혹하게 일어났다. 이로 인해 “사도들 외에는 다 흩어졌다”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교회 공동체는 각 지역으로 흩어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사울(훗날 바울)이 교회를 잔멸하고자 각 집을 수색하며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는 일까지 벌어졌다(행 8:3). 당시 핍박을 받은 성도들은 마치 큰 홍수에 휩쓸린 자처럼,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도행전 8장은 이러한 ‘흩어짐’이 결코 복음의 후퇴나 실패를 의미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성도들이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도피하듯 몸을 숨겼어도, 그곳에서 그들은 “복음의 말씀을 전”하게 된다(행 8:4). 인간적으로 보면 ‘슬프고 겁먹은 영혼’들의 이동이었으나, 하나님의 시선에서 보면 이 사건은 복음의 지경을 확장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을 벗어나 사마리아에까지 이르는 복음 전파가 본격화되었고,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더욱 넓은 지역으로 뻗어나가게 되었다.

이 대목은 예수님의 지상명령(Great Commission)을 다시금 상기시키기도 한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며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는데(마 28:19–20),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하신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성장하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자신들이 본격적으로 땅끝까지 가야 한다는 분명한 사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정 기간 동안은 한곳에 머무르는 상태로 안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스데반의 순교와 박해로 말미암아 억지로라도 흩어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복음 전파의 지평이 예루살렘 너머로 확대되었다.

이 장면을 두고 교회사학자들은 ‘사탄의 역설적 실패’라고 부르기도 한다. 악한 세력이 교회를 탄압함으로써 복음을 막으려 했지만, 오히려 그 탄압이 복음을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두려움과 비극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오히려 구원의 역사를 진전시키는 열쇠로 작용한 것이다. 이것은 초대교회 시절뿐 아니라 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 빈번히 나타난 패턴이다. 교회가 고난당할수록 복음은 오히려 더 멀리 퍼져나갔고, 성령의 권능을 힘입은 성도들은 그 흩어진 장소에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했다.

이와 같은 역사적 패턴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해의 정도와 형태는 달라졌으나, 교회가 세상 속에서 겪는 어려움과 핍박은 여전히 존재한다. 동시에 교회 내부에도 왜곡된 사상이나 복음을 흐리는 이단적 흐름, 또는 편협한 교권주의와 물질적·인간적 욕심 등이 섞여 들어올 때가 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가현설(도케티즘, Docetism)이라든지 영지주의(Gnosticism) 같은 잘못된 사상들이 성도들을 현혹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우리가 구원에 이르려면 스스로 안에 있는 어떤 신적 파티클(particle)을 개발해 온전한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복음을 흔들어 놓았다. 이런 내부적 도전과 외부적 박해 속에서도, 초대교회는 결국 ‘바른 복음’을 지켜냈고, 오히려 온 세상으로 뻗어나가는 원동력을 발견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초대교회의 모습을 주목하면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환란을 겪을 수는 있어도, 진정한 복음 전파의 사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해 왔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영광 중에도 사역할 수 있지만, 고난 중에도 여전히 놀라운 방법으로 복음을 펼쳐가신다. 성령은 억지로 흩어지게 된 상황에서조차 각 사람의 마음에 함께하시고, 그 교회 공동체가 흩어진 자리에서 새로운 역사와 만나게 하신다. 이런 이유로 “핍박과 환란이 결코 복음 전파의 동력을 잃게 하지는 않는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선교 현장에서의 도전과 역경을 ‘새로운 기회’로 해석하고 수용하는 교회론을 제시한다.

실제로 사도행전 8장 4절,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라는 구절은 ‘흩어짐’이 ‘사라짐’이 아니라 ‘확장’이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사람의 눈에는 패배처럼 보일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 광범위한 이동과 재배치를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이 증거되도록 하셨다. 당시 사마리아 지역은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던 땅이었고, 사회·종교적으로 유대와 갈등을 빚어온 역사가 있었다. 그런데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했을 때, 그곳에서도 많은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주로 고백했다(행 8:5 이하). 이 사건은 지리적·문화적 경계를 넘어서는 복음의 능력을 증거한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로, 세상이 갑자기 바뀌고 예상하지 못했던 시련이 몰려올 때—이를테면 전 세계를 뒤흔든 코로나19 팬데믹 같은 환란의 시기—예배 형태나 교회의 활동이 크게 제한될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핍박’이든 ‘환란’이든 어떠한 형태로든 겪게 되는 이 어려움을 하나님의 광대하신 목적 속에서 바라볼 때, 그것은 결국 새로운 형태의 복음 전파와 교회 공동체 형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환란을 만나 산산이 흩어지는 상황에서도, 성령이 머무는 교회는 결코 무너질 수 없다”라는 확신을 자주 강조한다. 성령은 모아주시기도 하지만 흩어지게도 하시며, ‘보이는 교회(visible church)’와 ‘보이지 않는 교회(invisible church)’를 아우르신다. 현대 교회가 예배당 건물이나 제도적 틀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복음을 인터넷이나 미디어를 통해 전하며, 다양한 문화적·사회적 접촉점을 활용해서 ‘보이지 않는 교회’를 넓혀 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초대교회 당시 성령이 흩어진 자들과 함께하셔서, 그들이 가는 곳마다 새로 세워지는 교회를 탄생시켰던 원리와 맞닿아 있다.

사도행전 8장에서 확인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교회가 ‘환란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 있다는 점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박해가 임하지 않았더라면 편안함에 안주하며 예루살렘 교회에만 모여 있을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박해라는 극단적 상황을 통해 성도들을 세상 구석구석으로 보내신다. 이 점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기쁜 노래를 부르며 자발적으로 흩어져 나간다면 얼마나 더 좋겠는가”라고 자주 역설한다. 즉, 억지로 몰려서가 아니라, 복음의 시급성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열정에 사로잡혀 자발적으로 떠나는 ‘순종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1장 28–30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두 아들의 비유처럼, 말만 하고 가지 않는 아들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자가 되어야 교회는 한순간의 환란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환란 때에 어쩔 수 없이 몸을 피하듯 복음을 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이미 ‘언제 어디로든 보냄받아 갈 준비가 된’ 상태여야 한다는 메시지다. 바울 역시 훗날 로마 황제의 박해 아래서도 끊임없이 편지를 써 교회들을 돌보았고, 감옥에서조차 복음을 전하였다(빌 1:12–14). 초대교회의 이 같은 모습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복음 전파의 원형질이다.

또한, 교회가 문화적·지역적 특수성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세워져야 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 사마리아에 내려간 빌립의 사역은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전통 유대교 관습과는 다른 새로운 문화적 맥락에 복음을 심어 넣은 사례다. 이와 유사하게 바울은 갈라디아, 에베소, 고린도 등 서로 다른 도시·문화권에 교회를 세울 때, 거기에 맞는 접근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다.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 에베소서 4장 등에서도 교회의 다양성 속의 일치를 강조하고 있으며, 각 지역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기능하되, 그 모양과 구조가 획일적이지 않음이 나타난다.

장재형목사는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명언, “종교는 문화의 본질이고, 문화는 종교의 옷이다(As religion is the substance of culture, culture is the form of religion)”를 자주 인용하며, “복음이라는 본질은 결코 바뀌지 않지만, 그것을 담고 있는 문화의 옷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라고 해석한다. 지금처럼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에는 SNS, 스트리밍, 온라인 커뮤니티, 화상회의 등 다양한 매체가 ‘복음을 담는 옷’이 될 수 있다. 결코 복음 자체를 변개해선 안 되지만, 전파의 형태와 교회 공동체 조직 방식은 얼마든지 달리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초대교회가 사도행전 8장 이후 점차 유대·사마리아를 넘어 소아시아와 로마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의 특성을 반영해 복음을 전한 것처럼, 현대 교회도 새로운 미디어와 방식, 여러 문화 영역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현대 교회에 당면한 또 다른 도전은 ‘개인의 구원’과 ‘역사의 구원’을 함께 균형 잡아 바라보는 것이다.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큰 주제는 창조, 타락(죄), 구원,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사망이 없고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 다시 없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과정’을 최종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거대 담론으로서의 역사를 이해할 때, 개인이 구원받는 것뿐만 아니라, 이 땅의 역사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함께 꿈꾸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역사의식이 현대 교회에서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초대교회 제자들이 예수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물었을 때(행 1:6), 예수님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정하셨다”라고 답하셨으나, 동시에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라고 당부하셨다. 이 땅의 역사 속에 복음이 자라나고, 하나님의 나라는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소망 안에서, 교회는 끊임없이 다음 세대를 일으켜 세우고, 전 세계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단순히 예배당 안에서만 머무르거나 교세 확장만을 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메시지가 사도행전 8장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초대교회는 스데반의 순교와 함께 불어닥친 대규모의 박해로 인해 성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이 흩어짐이 오히려 복음 전파의 문을 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반대와 핍박을 통해서도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며, 성령의 권능은 흩어진 성도들의 입과 발, 그리고 삶을 통해 새로운 지역에 복음을 뿌리내리도록 하셨다. 교회는 억지로 밀려나서가 아니라, 자발적 순종과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기꺼이 ‘땅끝’을 향해 가야 한다. 이것이 사도행전 8장 1–5절이 보여주는 초대교회의 모습이며, 또한 장재형목사가 늘 강조해온 복음 전파의 정신이기도 하다.

2. 현대 교회의 도전, 새로운 복음 전파 방식

사도행전 8장을 통해 확인한 초대교회의 역동성과 성령의 역사는 오늘날 교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문제는 시대가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교회가 세워진 1세기 지중해 세계와 비교할 때, 현재 인류는 기술, 문화, 경제, 정치, 사회 모든 면에서 엄청난 변화를 경험해 왔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많은 교회가 전통적인 예배 형태와 모임 방식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빠르게 온라인 예배나 비대면 모임을 시도해야 했다. 어떤 지역에서는 모이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신앙을 잃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동시에, ‘대면 예배’에 대한 지나친 고집으로 사회적 비판을 받기도 했다. 교회가 과연 이런 급변하는 환경에서 어떻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이어갈 것인지가 주요 과제로 떠올랐다.

장재형목사는 오랜 기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선교와 목회 활동을 해오면서, “교회가 건물을 벗어나 사람들의 실제 생활 영역 속으로, 그리고 미디어의 장(場) 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거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름다운 발’을 가지고 먼 나라를 직접 찾아가야만 했다면(롬 10:15), 현대에는 ‘미디어’가 발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과 SNS, 모바일 기기가 발달함에 따라, 교회는 직접 사람이 오지 않아도 복음을 전달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를 얻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메시지를 어떻게 전할 것인가’이며, 그 메시지의 핵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라는 불변의 진리여야 한다.

실제 장재형목사는 “Moving Forward”라는 슬로건처럼, 교회가 후퇴하거나 정체되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핍박이 닥치면 핍박 속에서, 환란이 오면 환란 속에서, 평안한 시기가 오면 평안함 속에서—어떤 상황에서도 교회는 절대 복음 전파의 엔진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초대교회처럼 ‘흩어지는 교회’가 되면 약화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 흩어짐이 ‘네트워크화’된 재배치로 작용할 수도 있다. 현 시대의 교회는 SNS나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흩어져 있으면서도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예루살렘 교회가 스데반의 순교 이후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갔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이 ‘새로운 교회의 형태’는 단지 모임을 온라인으로 바꾸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교회 운영, 제자훈련, 전도·선교 등의 모든 측면에서 디지털 환경을 교회 본연의 사명과 창의적으로 결합해야 한다는 의미다. 과거 초대교회가 회당과 성전, 그리고 가정 교회라는 다양한 형태를 오가며 사람들을 가르쳤던 것처럼, 현대 교회도 예배당, 온라인, 가정, 지역 커뮤니티 센터 등 다양한 공간을 활용해 복음을 심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헌금, 재정 운용, 인력 양성, 성찬과 세례 같은 성례전의 진행 등, 전통적 교회가 익숙하게 유지해 온 요소들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적용할 것인지는 상당히 신학적이고도 실천적인 과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본질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강조한다. 교회의 본질, 곧 “그리스도의 몸이자 성령의 전이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는 공동체”라는 사실만 분명히 붙들고 있다면, 옷과 같은 외형적 문화 형식이 바뀌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본질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성령의 내주, 하나님의 나라 완성에 대한 소망 등 기독교 진리의 핵심 교리는 시대를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다.
  2. 형식은 변할 수 있다.
    예배당 중심 예배에서 온라인 예배로 확장되거나, 주일 한 번 모이는 형태에서 주중 소그룹 혹은 지역 공동체 활동으로 늘어나거나, 교회 재정 운영 방식이 바뀔 수 있다. 이것은 본질과 충돌하지 않는 한 모두 ‘문화의 옷’에 해당한다.
  3.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
    핍박이 오든 환란이 오든, 혹은 교회가 비교적 평온하고 사회적 신뢰를 받고 있든,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성령은 때로는 흩어지게도 하시고, 때로는 한데 모이게도 하시며, “어떻게, 어디서, 누구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신다. 빌립이 사마리아로 인도받아 복음을 전했고(행 8:5), 또한 이디오피아 내시의 수레 옆으로 가서 말씀을 가르친 것처럼(행 8:26–39), 현대 교회도 성령의 인도 아래 움직여야 한다.
  4. 새 시대에 맞는 교육과 제자 양성이 필수적이다.
    초대교회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지만, 회당에서 말씀을 교육했고, 가정 교회나 작은 모임에서도 끊임없이 가르쳤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미 자녀를 교육하는 전통이 강했기에, 회당 교육이 효과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다. 현대 교회도 시대의 변화에 맞는 교육 플랫폼, 청소년·청년 사역 모델, 온라인 성경 공부, 미디어 활용 등을 개발해야 한다. 이것이 없이는 교회가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다음 세대에게 복음을 전수할 수 없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원칙하에, “디자이너와 IT worker를 귀하게 여기라”고 강조한다. 복음 전파의 ‘아름다운 발’이 이제는 IT 인프라와 디지털 콘텐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이 ‘새로운 발’을 잘 활용하려면, 이를 이끌 인재가 필요하고, 그러한 인재가 실력을 발휘하여 디지털 사역을 활성화해야 한다. 크리스천 디자이너, 영상 편집자, IT 전문가, 온라인 마케터 등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재능을 봉사와 사역으로 연결한다면, 전 세계 어디든 즉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창구가 열릴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그는 “교회가 하나의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초대교회는 교인들이 공동체적으로 재산을 나누고(행 2:44–45), 사도들의 가르침을 함께 배우며(행 2:42), 서로 돌보고 교제했다. 오늘날 교회도 이러한 ‘연결’과 ‘돌봄’ 기능을 디지털 환경에서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신자들이 말씀을 배우고, 서로 소식을 나누며, 지역사회의 어려운 이들을 돕고, 개인 상담과 기도 요청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렇게 교회가 플랫폼화되면, 물리적 공간의 제약이나 거리의 장벽을 뛰어넘어 훨씬 더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동시에 성도 간의 교제를 풍성하게 할 수 있다.

나아가,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에게 주신 구원 역사의 흐름 안에 있다”는 ‘역사 신학적’ 시각을 늘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사도행전 1장 8절에 언급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과도 맞닿아 있다. 단지 지역 교회만을 성장시키는 것을 넘어서, 지구상의 모든 민족과 나라가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교회가 끊임없이 준비하고 파송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교회가 여러 나라에 맞는 ‘현지화된 형태’로 세워져야 한다. 음식 문화, 의복, 언어, 인프라 환경 등은 제각각 다르기에, 어느 지역 교회든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선 현장의 상황에 맞게 적응해야 한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소아시아, 로마 등 각기 다른 문화권에 맞춰 교회 모델을 달리했음을 상기시키며,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와 유대인의 정체성을 함께 활용해 복음을 폭넓게 전했던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오늘날 인터넷은 이러한 ‘다양한 문화권’을 한꺼번에 연결할 수 있는 획기적 통로다. 이를 통해 선교가 훨씬 더 빠르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예컨대,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 마을에 직접 선교사가 들어가기 이전에, 온라인 콘텐츠나 통역 영상을 통해 먼저 복음을 소개할 수도 있다. 또는 현지의 소규모 공동체가 온라인으로 훈련을 받고, 함께 기도와 예배를 드릴 수도 있다. 이를 체계적으로 운영하려면 교회가 ‘디지털 선교 센터’나 ‘온라인 미션 스쿨’ 같은 조직을 마련하고, 교역자나 선교사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새로운 시대로 가는 길을 예비하는 교회”라고 칭하며, “곧 새벽이 오리라”라는 확신 속에 교회가 선제적으로 움직이길 촉구한다.

그는 또한 “마지막 때에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 과정”에 적극 동참해야 할 필요성을 부단히 제기한다. 초대교회에서부터 이뤄져 온 복음 확장이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며, 다양한 장애와 영적 전투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교회를 통해 계속 일하시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오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해 복음이 먼저 전파되어야 한다”(막 13:10)는 말씀대로 역사적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결국, 초대교회가 가졌던 영적 DNA—곧 환란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복음 확장의 발판으로 삼았던 불굴의 믿음, 문화와 지역 경계를 뛰어넘어 기꺼이 흩어져 간 선교 정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순종—이 현대 교회에도 필요하다는 결론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DNA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미디어와 IT 기술, 온라인 네트워크, 그리고 시대적 문화 트렌드를 적극 활용하여 전 세계로 나아가는 교회를 형성하길 촉구한다.

핵심은 ‘바른 복음’과 ‘참된 교회론’을 견지하는 것이다. 아무리 최신 기술과 플랫폼을 사용한다 해도, 복음 자체가 흐려지거나 진리가 왜곡되면 교회의 생명력은 사라진다. 반대로, 복음의 핵심이 견고히 서 있고 교회의 본질을 지키는 가운데, 시대 변화에 능숙하게 대처하며 다양한 사역을 시도한다면, 초대교회의 “흩어지는 중에도 전진하는 교회”가 오늘날에도 힘차게 재현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추수의 때’를 맞이하고 있다고 자주 언급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영적 갈급함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찾아 방황하는 시대이기에, 교회가 정확하고도 따뜻한 복음을 제시한다면 많은 영혼이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다. 사도행전 8장 8절 이하에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많은 사람을 고치고 복음을 전했을 때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고 나와 있다. 이처럼 기쁨이 없는 세상 가운데 기쁨이 전해지고, 절망하는 곳에 소망이 전해지는 것이 복음 사역의 핵심이자 결실이다.

한편, 교회가 이렇게 ‘흩어지는 교회’이자 ‘네트워크 교회’로 변모하는 과정에서는 내부적으로 여러 가지 도전이 뒤따른다. 기존 제도권 교회 내부에서 이러한 변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호의적이지 않을 수 있고, 물리적 예배당과 공동체성을 중시하는 전통 교인들과 갈등이 발생할 수도 있다. 성찬이나 세례를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문제, 직분의 위임과 목회적 치리가 어떻게 이뤄질지 등에 대한 신학적 논의도 아직 충분히 정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재형목사는 “복음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이 모든 논의를 거치면서도 결국 전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예루살렘 교회와 사마리아, 더 나아가 안디옥 교회가 함께 겪었던 시행착오의 현대판”이라고 부른다. 유대인 중심의 초대교회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맞닥뜨린 문화적, 신학적, 실천적 갈등(행 10장, 갈 2장 등)을 생각해 보면, 교회 역사는 언제나 자기 갱신과 확장을 통해 성장해 왔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까지 ‘완성된 형태’로 머무는 법이 없으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개혁하고 복음의 지평을 넓혀가야 한다.

결론적으로, 사도행전 8장 1–5절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흩어짐과 복음 확장’은, 현대 교회가 갈 길을 조명하는 강력한 등불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는 늘 성령의 능력이 함께하며,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주도하신다. 교회가 성령께 순종해 모일 때는 모이고, 흩어질 때는 흩어져야 한다. 이 원리를 현대에 적용할 때, ‘보이지 않는(invisible) 교회’와 ‘보이는(visible) 교회’가 동시에 작동하는 시대적 교회론이 가능해진다. 또, 개인 구원만이 아닌 역사의 구원을 꿈꾸는 거시적 안목 속에서, 이 세상의 흐름을 성경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의 섭리에 맞추어 모든 열방으로 나아가는 ‘미디어 시대의 선교’가 활짝 열릴 수 있다.

장재형목사가 제시하는 방향은 결국 “상황에 매이지 않되, 상황을 역이용해 복음 확장을 이루라”는 메시지에 요약된다. 이는 초대교회가 박해를 ‘전진의 계기’로 삼은 것처럼, 현대 교회도 역병이나 사회적 제약, 문화적 편견과 불신 속에서도 여전히 ‘Moving Forward’ 해야 한다는 의미다. 성령은 지금도 살아계시며, 교회를 통해 역사하시고,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모든 민족과 열방에 나타내신다. 교회는 그 부름에 응답하여—흩어지든 모이든,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끊임없이 복음을 말하고 나누어야 한다.

사도행전 8장에서 스데반의 죽음에 대한 큰 울음 뒤에도 빌립이 사마리아로 내려가 복음을 선포하며 기쁨을 전했던 것처럼, 현대 교회도 오히려 어려운 시대 한복판에서 기쁨과 소망의 메시지를 증거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핍박과 환란이 클수록, 성령의 임재와 권능은 더욱 강하게 역사할 수 있음을 기억하자. 그렇기에 우리가 이 땅에서 순례자로 살면서도 담대해질 수 있고, 어떤 모양으로든 교회를 이어가며 복음을 확장해 갈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배후에는, 초대교회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며, 그 하나님께서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모든 복음의 일꾼에게 “가라, 그리고 전하라”라고 명령하신다. 핍박이나 환란이 아니라, 사랑과 순종과 기쁨의 동력으로 자발적으로 나아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한국 교회, 세계 교회가 사도행전적 부흥과 역동성을 다시금 회복하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사명을 다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핵심은 “초대교회 역사를 통해 본 복음의 확장과 현대 교회가 마주한 변화, 그리고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바른 복음과 새로운 교회 패러다임”이다. 초대교회는 박해 속에서도 흩어짐이 복음 확장의 계기가 되었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어디에서나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다. 현대 교회는 다른 차원의 도전에 직면했지만, 여전히 같은 성령과 동일한 복음을 붙들고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부각하면서, “교회가 이제 시대에 맞춰 유연하고도 강력하게 확장해 가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사도행전 8장을 자세히 살피며 깨닫게 되는 진리이며, 믿음 공동체로서 실천해야 할 분명한 방향이다.

prismpress.kr

在绝望尽头绽放的恩典与盼望 – 张大卫牧師 (Olivet University)

1654年11月23日深夜,哲学家布莱兹·帕斯卡尔在那道骤然临到、压倒一切的光面前,握起笔,用颤抖的手在羊皮纸上留下了一段短短的文字:“火。不是哲学家和学者的上帝,而是亚伯拉罕、以撒、雅各的上帝。” 当那位曾被冰冷教义与理性逻辑囚禁起来的上帝,作为焚烧灵魂深渊的真实存在向他临近时,他才终于学会了真正的俯伏。使徒保罗在书写罗马书第11章时所发出的“上帝弃绝了祂的百姓吗?”这一叹息,同样也是如此炽热如火的信仰告白。张大卫牧师正是在这一处,使我们的脚步停了下来。他敦促我们认识到,圣经默想并不只是书房里积累知识的事务,而应成为一种属灵的呼吸,震动我们存在的根基,并使我们转回正确的方向。

在崩塌之处绽放的恩典

从罗马书第9章开始流淌而出的保罗论证,贯穿了以色列的拒绝与外邦人的得救这一宏大的救赎史脉络。在绝望看似最为合理的结论的时代,以利亚在荒凉旷野的尘土之中,被“唯独自己还存留”的孤独压得喘不过气来,向上帝呼求。然而,来自天上的回答,仿佛嘲笑人类悲观的统计数字一般,宣告上帝已经为自己保留了七千个未曾向巴力屈膝的人。这是严肃而确凿的护理。张大卫牧师清楚指出,“余民”的奥秘并不建立在人卓越的能力或坚强的意志之上。倘若其中稍稍掺杂了我们的某种资格或成就,它就不再能成为完全的福音。即使在背叛与黑暗的历史之中,上帝仍以彻底的主权为自己保留祂的人,并借着他们再次延续生命的叙事。正如卡拉瓦乔的画布上,那道光单方面闯入从马上跌落、双目失明的扫罗身上一般,所谓恩典,就是当我功劳的位置被完全倒空时,才涌流而入的、来自天上的独一礼物。

丰盛的筵席成为灵魂的陷

然而,余民的存在并不意味着可以合理化某种特权阶层的优越感;相反,它更痛切地照出了那些受邀却轻忽筵席之人的悲剧。圣经沉重地警告我们,耳朵关闭、眼睛昏蒙的属灵麻痹状态是何等危险。诗篇中关于“充满胜利与安逸的饭桌,反倒可能成为绊住灵魂脚踝的网罗”的引用,带给人一种寒意透骨的痛感。踏进教会的院落,停留在熟悉的制度围栏之内,并不会自动保证一个人与基督之间拥有生命性的联合。当丰盛使我们失去贫穷的心时,那华丽便会立刻引向一种惨烈的坠落:瞎子领着瞎子,最终一同跌入坑中。真正的神学洞见,应当成为一面镜子,折断我们原本仰望高处的目光,使我们辨明自己此刻所站之处,究竟是傲慢的讲台,还是十字架的面前。我们不应只是坐在华丽婚筵的餐桌旁感到满足,而应时时省察自己是否穿上了被基督宝血洗净的礼服。

失落,拓救恩地平线的手

保罗的目光在绝望的尽头,再次跃向耀眼的反转。以色列的跌倒并没有以单纯的毁灭告终,反而成为救恩流向外邦人的祝福通道。上帝的智慧,甚至将人的失败与罪恶也作为材料,开启更广阔的爱之舞台,这远远超出我们的测度。张大卫牧师强调,这场超越悲剧的救恩反转,要求我们怀有更深的顺服与谦卑。临到我的怜悯,是在某人的眼泪与十字架的牺牲之上绽放的花。我们常常会陷入属灵的骄傲,把自己所领受的光当作资格证书一般挥舞,用来裁断他人。然而,真正的信心并不是看见他人的空缺便生出优越感,而是参与上帝那颗愿意一同拯救他们的痛楚之心。正如米开朗基罗天顶画中,造物主的指尖主动伸向无力的亚当,我们的救恩也唯有借着那位绝对者的爱,填满那看似将触未触的间隙,才得以完成。

最终,罗马书第11章宏大的叙事,都汇聚为一句满溢感动的赞美:“深哉,上帝丰富的智慧和知识!” 这并不是单纯理论上的结论,而是唯有彻底认识自身无力之人,才能唱出的灵魂绝唱。站在这庄严的话语面前,我们也随着张大卫牧师的劝勉,痛切地直面自己的属灵体质。今天,我的信仰究竟是在安逸的饭桌前沉醉,失去属灵感官而逐渐僵化;还是每天俯伏在重新浇灌下来的慈悲面前,结出真诚的悔改与盼望?我们绝不是靠自己站立的人,而是凭着一根名为怜悯的绳索,勉强却又最安全地悬挂其上的余民。此刻,你是否正站在那恩典的悬崖边缘,向失丧之人敞开喜乐筵席的大门,活出这样的生命?

www.davidjang.org

絶望の果てに咲く恵みと希望 – 張ダビデ 牧師 (Olivet University)

1654年11月23日の深夜、哲学者ブレーズ・パスカルは、自分を包み込んだ圧倒的な光の前でペンを握り、震える手で羊皮紙に短い言葉を書き残した。「火。哲学者や学者の神ではなく、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の神。」冷たい教理と理性の論理の中に閉じ込めていた神が、魂の深淵を焼き尽くす実在として迫ってきたとき、彼は初めて真のひれ伏しを学んだ。使徒パウロがローマ書11章を記しながら吐き出した「神はご自分の民を退けられたのか」という嘆きもまた、これと同じ熱い火の告白である。張ダビデ牧師は、まさにこの地点で私たちの歩みを立ち止まらせる。彼は、聖書黙想とは単に知識を蓄積する書斎の営みではなく、私たちの存在の底を揺さぶり、向かう方向を転じさせる霊的な呼吸でなければならないと促している。

崩れ落ちた場所にみの

ローマ書9章から続くパウロの論証は、イスラエルの拒絶と異邦人の救いという、壮大な救済史の流れを貫いている。絶望こそが最も合理的な結論に見えた時代、エリヤは荒涼とした荒野の土ぼこりの中で、自分だけが残されたという孤独に押しつぶされ、神に叫び求めた。しかし天からの答えは、人間の悲観的な統計をあざ笑うかのように、バアルに膝をかがめなかった七千人を神が隠しておられたという厳然たる摂理であった。張ダビデ牧師は、この「残された者」の神秘が、人間の卓越性や強靭な意志の上に成り立つものではないことを明確に指摘する。もし私たちの何かが少しでも混じるなら、それはもはや完全な福音ではあり得ない。神は裏切りと闇の歴史の中でも、徹底した主権によってご自分の民を残しておかれ、彼らを通して再び命の物語を紡いでいかれる。カラヴァッジョのキャンバスの上で、馬から落ちて目が見えなくなったサウロに光が一方的に侵入したように、恵みとは、私の功績の場所を完全に空にしたとき、初めて押し寄せてくる天からの唯一無二の贈り物である。

豊かな食卓が魂の罠となるとき

しかし、残された者がいるという事実は、特権層の優越感を正当化するものではない。むしろ、招かれながらもその宴を顧みなかった者たちの悲劇を、痛切に照らし出す。聖書は、耳が閉ざされ、目が見えなくなった霊的麻痺の状態について重く警告している。勝利と安楽に満ちた食卓が、かえって魂の足を取る罠となり得るという詩篇の引用は、冷たい痛覚を呼び起こす。教会の庭を踏み、慣れ親しんだ制度の囲いの中に留まっているからといって、それがキリストとの命ある結合を自動的に保証してくれるわけではない。豊かさが私たちから貧しい心を失わせるとき、その華やかさは、目の見えない者が目の見えない者を導き、穴に落ちていくような悲惨な転落へと直結する。真の神学的洞察とは、高みへ向かっていた私たちの視線を折り曲げ、今自分が立っている場所が傲慢の壇上なのか、それとも十字架の前なのかを見分けさせる鏡でなければならない。私たちは華やかな婚宴の食卓に座って満足するのではなく、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洗われた礼服を身にまとっているのか、絶えず省みなければならない。

喪失を越えて救いの地平をげる御手

パウロの視線は、絶望の果てから再びまばゆい逆転へと跳躍する。イスラエルのつまずきは、単なる破局で終わることなく、むしろ救いが異邦人へと流れていく祝福の通路となった。人間の失敗と罪悪さえも材料として用い、さらに広大な愛の舞台を開いていかれる神の知恵は、私たちの測り知れる範囲をはるかに超えている。張ダビデ牧師は、この悲劇を越えた救いの逆転劇が、私たちに深い従順と謙遜を求めていると力説する。私に臨んだ憐れみは、誰かの涙と十字架の犠牲の上に咲いた花である。私たちはしばしば、自分が受けた光を資格証のように振りかざし、他者を裁く霊的高慢に陥ってしまう。しかし真の信仰とは、他者の空席を見て優越感を抱くことではなく、共に生かそうとされる神の痛む心に参与することである。ミケランジェロの天井画の中で、創造主の指先が力なきアダムへと能動的に伸びていくように、私たちの救いもまた、その届きそうで届かない隔たりを満たしてくださる絶対者の愛によってのみ完成される。

結局、ローマ書11章の壮大な物語は、「ああ、神の知恵と知識の富はなんと深いことでしょう」という胸あふれる賛美へと収束していく。これは単なる理論的結論ではなく、自らの無力さを徹底的に悟った者だけが歌うことのできる、魂の絶唱である。この荘厳な御言葉の前で、私たちは張ダビデ牧師の勧めに従い、自らの霊的体質と痛切に向き合うことになる。今日の私の信仰は、安楽な食卓に酔いしれ、霊的感覚を失ったまま硬直しているのか。それとも、日々新たに注がれる慈しみの前にひれ伏し、真実な悔い改めと希望を形づくっているのか。私たちは決して自力で立っている者ではない。憐れみという名の綱に、かろうじて、しかし最も安全に吊り下げられている、残された者たちなのである。あなたは今、その恵みの崖の端で、失われた者たちに向かって喜びの宴の扉を開いておく生き方をしているだろうか。

日本オリベットアッセンブリー教団

www.davidjang.org

La gracia y la esperanza que florecen al final de la desesperación – Pastor David Jang (Olivet University)

La noche profunda del 23 de noviembre de 1654, el filósofo Blaise Pascal, ante una luz abrumadora que lo envolvió, tomó la pluma y, con la mano temblorosa, dejó unas breves palabras escritas en un pergamino: “Fuego. Dios de Abraham, Dios de Isaac, Dios de Jacob; no el Dios de los filósofos y de los sabios”. Cuando aquel Dios, al que había intentado encerrar en frías doctrinas y en la lógica de la razón, se acercó como una realidad capaz de incendiar los abismos del alma, Pascal aprendió por fin lo que significaba postrarse verdaderamente. También el lamento que el apóstol Pablo exhala al escribir Romanos 11 —“¿Ha desechado Dios a su pueblo?”— es una confesión nacida de ese mismo fuego ardiente. En este punto, el pastor David Jang detiene nuestros pasos. Él nos exhorta a comprender que la meditación bíblica no debe ser simplemente una tarea de biblioteca destinada a acumular conocimiento, sino una respiración espiritual capaz de sacudir los cimientos de nuestra existencia y hacernos volver la mirada hacia Dios.

La providencia de la gracia que florece en el lugar del derrumbe

El argumento de Pablo, que fluye desde Romanos 9, atraviesa la gran corriente de la historia redentora: el rechazo de Israel y la salvación de los gentiles. En una época en la que la desesperación parecía la conclusión más razonable, Elías, oprimido por la soledad de creerse el único que quedaba, clamó a Dios entre el polvo de un desierto desolado. Sin embargo, la respuesta del cielo fue una providencia solemne que parecía burlarse de las estadísticas pesimistas del ser humano: Dios se había reservado siete mil hombres que no habían doblado la rodilla ante Baal. El pastor David Jang señala con claridad que el misterio de este remanente no se sostiene sobre la excelencia humana ni sobre una voluntad fuerte. Si se mezclara en ello siquiera una mínima parte de nuestro propio mérito, ya no podría ser plenamente evangelio. Incluso en medio de la historia de la traición y de las tinieblas, Dios preserva a los suyos mediante su soberanía absoluta y, a través de ellos, vuelve a dar continuidad al relato de la vida. Así como en el lienzo de Caravaggio la luz irrumpe unilateralmente sobre Saulo, caído del caballo y cegado, la gracia es el don exclusivo del cielo que solo se desborda cuando el lugar de mis méritos queda completamente vacío.

Cuando la mesa de la abundancia se convierte en trampa para el alma

Sin embargo, el hecho de que exista un remanente no justifica ningún sentimiento de superioridad en una élite privilegiada; más bien ilumina dolorosamente la tragedia de quienes, aun habiendo sido invitados, despreciaron el banquete. La Escritura advierte con gravedad sobre el estado de parálisis espiritual en el que los oídos se cierran y los ojos quedan ciegos. La cita del salmo, que muestra cómo una mesa llena de victoria y comodidad puede convertirse en un lazo que atrapa el alma, nos transmite un estremecedor sentido de alarma. Pisar el patio de la iglesia y permanecer dentro de los cercos familiares de una institución no garantiza automáticamente una unión vital con Cristo. Cuando la abundancia nos hace perder un corazón pobre y humilde, su esplendor conduce directamente a la terrible caída de un ciego que guía a otro ciego hasta que ambos caen en el hoyo. El verdadero discernimiento teológico debe convertirse en un espejo que quiebre nuestra mirada dirigida hacia las alturas y nos ayude a distinguir si el lugar donde estamos de pie es una plataforma de arrogancia o el espacio ante la cruz. No debemos conformarnos con sentarnos satisfechos a la mesa de un espléndido banquete de bodas; debemos examinarnos a cada instante para saber si llevamos puesta la vestidura lavada con la sangre de Cristo.

La mano que ensancha el horizonte de la salvación más allá de la pérdida

La mirada de Pablo, desde el límite de la desesperación, vuelve a elevarse hacia una inversión deslumbrante. La caída de Israel no terminó simplemente en catástrofe; por el contrario, se convirtió en un canal de bendición por el que la salvación fluyó hacia los gentiles. La sabiduría de Dios, que incluso toma como material el fracaso y el pecado humanos para abrir un escenario más amplio de amor, queda infinitamente más allá de nuestra capacidad de medirla. El pastor David Jang subraya que este drama de salvación, que invierte la tragedia, exige de nosotros una obediencia profunda y una humildad radical. La misericordia que ha venido sobre mí es una flor que brotó sobre las lágrimas de alguien y sobre el sacrificio de la cruz. Con frecuencia caemos en la soberbia espiritual de blandir la luz que hemos recibido como si fuera una credencial, juzgando a los demás desde ella. Pero la fe verdadera no consiste en sentir superioridad al contemplar el vacío de otros, sino en participar del corazón doliente de Dios, que desea dar vida a todos juntos. Así como en el fresco del techo de Miguel Ángel la punta de los dedos del Creador se extiende activamente hacia el impotente Adán, nuestra salvación también se completa únicamente por el amor del Absoluto, que llena esa distancia casi imperceptible entre lo que parece tocarse y lo que aún no se alcanza.

Al final, la gran narración de Romanos 11 converge en una alabanza desbordante: “¡Oh profundidad de las riquezas de la sabiduría y del conocimiento de Dios!”. Esta no es una simple conclusión teórica, sino el canto supremo del alma que solo puede entonar quien ha reconocido por completo su propia impotencia. Ante esta palabra majestuosa, siguiendo la exhortación del pastor David Jang, nos vemos obligados a confrontar dolorosamente nuestra propia constitución espiritual. ¿Está mi fe de hoy endureciéndose, embriagada por una mesa cómoda y habiendo perdido la sensibilidad espiritual? ¿O está postrada cada día ante la misericordia que se derrama de nuevo, dando forma a un arrepentimiento sincero y a una esperanza verdadera? Nosotros no somos personas que permanecen de pie por sí mismas; somos los que han sido preservados, apenas sostenidos —pero de la manera más segura— por un cordón llamado misericordia. ¿Vives ahora, al borde de ese precipicio de gracia, manteniendo abierta la puerta del banquete de la alegría para los perdidos?

www.davidjang.org

La grâce et l’espérance qui fleurissent au bout du désespoir – Pasteur David Jang (Olivet University)

Dans la nuit profonde du 23 novembre 1654, le philosophe Blaise Pascal, saisi par une lumière écrasante, prit sa plume et, d’une main tremblante, inscrivit quelques mots sur un parchemin : « Feu. Dieu d’Abraham, Dieu d’Isaac, Dieu de Jacob, non des philosophes et des savants. » Lorsque le Dieu qu’il avait enfermé dans les doctrines froides et la logique de la raison s’approcha de lui comme une réalité brûlant les abîmes de l’âme, Pascal apprit enfin ce qu’était la véritable prosternation. Le cri que l’apôtre Paul laisse jaillir en écrivant Romains 11 — « Dieu aurait-il rejeté son peuple ? » — relève lui aussi d’une telle confession de feu. C’est précisément à cet endroit que le pasteur David Jang nous invite à arrêter nos pas. Il exhorte à comprendre que la méditation biblique n’est pas seulement une affaire de bibliothèque destinée à accumuler des connaissances, mais qu’elle doit devenir un souffle spirituel capable d’ébranler les fondations de notre être et de réorienter notre marche.

La providence de la grâce qui fleurit sur les lieux effondrés

L’argumentation de Paul, qui se déploie depuis Romains 9, traverse le grand courant de l’histoire du salut : le refus d’Israël et le salut des païens. À une époque où le désespoir semblait être la conclusion la plus rationnelle, Élie, écrasé par la solitude de se croire seul survivant au milieu de la poussière du désert, cria vers Dieu. Pourtant, la réponse du ciel, comme pour déjouer les statistiques pessimistes des hommes, révéla une providence indéniable : Dieu s’était réservé sept mille hommes qui n’avaient pas fléchi le genou devant Baal. Le pasteur David Jang souligne clairement que le mystère de ce reste ne repose ni sur l’excellence humaine ni sur la force de la volonté. Si la moindre parcelle de ce que nous sommes venait s’y mêler, l’Évangile ne pourrait plus demeurer pleinement Évangile. Même au cœur d’une histoire marquée par la trahison et les ténèbres, Dieu, dans sa souveraineté absolue, garde pour lui ses serviteurs et poursuit à travers eux le récit de la vie. De même que, sur la toile du Caravage, la lumière fait irruption de manière unilatérale sur Saul tombé de son cheval et devenu aveugle, la grâce est ce don souverain du ciel qui déferle seulement lorsque la place de nos propres mérites a été entièrement vidée.

Quand la table de l’abondance devient un piège pour l’âme

Cependant, l’existence d’un reste ne justifie aucun sentiment de supériorité chez les privilégiés ; elle met au contraire douloureusement en lumière la tragédie de ceux qui, bien qu’invités, ont ignoré le festin. L’Écriture avertit avec gravité contre cet état de paralysie spirituelle où les oreilles se ferment et les yeux s’aveuglent. La citation du psaume affirmant qu’une table remplie de victoire et de confort peut devenir un filet qui retient les chevilles de l’âme produit une douleur froide et pénétrante. Fouler la cour de l’Église et demeurer à l’intérieur des clôtures familières d’un système religieux ne garantit pas automatiquement une union vivante avec le Christ. Lorsque l’abondance nous fait perdre la pauvreté du cœur, son éclat conduit aussitôt à la chute tragique où un aveugle guidant un autre aveugle tombe dans la fosse. Le véritable discernement théologique doit devenir un miroir qui détourne notre regard des hauteurs vers lesquelles il se portait, afin de nous aider à reconnaître si l’endroit où nous nous tenons aujourd’hui est une estrade d’orgueil ou le pied de la croix. Nous ne devons pas nous contenter d’être assis à la table éclatante du banquet de noces ; nous devons vérifier à chaque instant si nous portons le vêtement de noces lavé dans le sang du Christ.

La main qui élargit l’horizon du salut au-delà de la perte

Le regard de Paul, au terme du désespoir, s’élance de nouveau vers un renversement éblouissant. La chute d’Israël ne s’achève pas en simple catastrophe ; elle devient au contraire le canal de bénédiction par lequel le salut se répand vers les païens. La sagesse de Dieu, qui utilise même l’échec et le péché humains comme matériaux pour ouvrir une scène d’amour plus vaste encore, dépasse infiniment notre capacité de mesure. Le pasteur David Jang insiste sur le fait que ce renversement salvateur au-delà de la tragédie exige de nous une obéissance profonde et une véritable humilité. La miséricorde qui m’a été accordée est une fleur éclose sur les larmes de quelqu’un et sur le sacrifice de la croix. Trop souvent, nous brandissons la lumière que nous avons reçue comme un certificat nous autorisant à juger les autres, et nous sombrons ainsi dans l’orgueil spirituel. Mais la foi véritable ne consiste pas à ressentir une supériorité devant la place vide d’autrui ; elle consiste à participer au cœur douloureux de Dieu, qui veut sauver tous ensemble. Comme, dans la fresque de Michel-Ange, le doigt du Créateur s’étend activement vers Adam impuissant, notre salut aussi s’accomplit uniquement par l’amour de l’Absolu qui comble l’espace presque infranchissable entre lui et nous.

Au bout du compte, le grand récit de Romains 11 converge vers cette louange débordante : « Ô profondeur de la richesse, de la sagesse et de la connaissance de Dieu ! » Il ne s’agit pas d’une simple conclusion théorique, mais du chant suprême de l’âme que seul peut entonner celui qui a pleinement reconnu sa propre impuissance. Devant cette parole majestueuse, nous sommes conduits, selon l’exhortation du pasteur David Jang, à affronter douloureusement notre propre constitution spirituelle. Ma foi aujourd’hui est-elle en train de se figer, ivre d’une table confortable et privée de sensibilité spirituelle ? Ou bien se prosterne-t-elle devant la miséricorde répandue chaque jour à nouveau, façonnant en moi une repentance sincère et une espérance vivante ? Nous ne sommes jamais des êtres qui tiennent debout par eux-mêmes. Nous sommes ceux qui ont été laissés, suspendus de justesse — et pourtant de la manière la plus sûre — au lien appelé miséricorde. Toi qui te tiens maintenant au bord de cette falaise de grâce, mènes-tu une vie qui garde ouverte la porte du banquet de joie pour ceux qui sont perdus ?

www.davidja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