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흑암의 골짜기를 가르는 부활의 도정: 장재형목사의 데살로니가 교회의 환난과 종말론적 실존

길고 깊은 숲에서 방향을 잃고 고립된 방랑자는 비로소 나뭇가지 사이로 드러난 밤하늘의 별을 보며 진정한 방위를 묻게 됩니다. 알레object 명작인 단테의 《신곡》이 인생의 영적 방황을 음산하고 어두운 이미지로 열어젖히며 신성한 순례의 길을 예비하듯, 인류의 신앙 역시 삶의 토대가 가장 격렬하게 흔들리는 실존적 위기의 자리에서 비로소 자신이 끝까지 붙들어야 할 절대적인 영원의 빛을 발견하곤 합니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강해 설교가 은혜와 진리의 렌즈로 비추는 초대 데살로니가 교회의 영적 풍경은 바로 그와 같은 극심한 흑암의 한복판에 우뚝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물질적인 풍요나 사회적인 안정, 혹은 신앙생활을 하기에 편안하고 안락한 조건 속에서 복음의 씨앗을 건네받은 사람들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사방에서 목을 조여오는 잔혹한 핍박과 사회적 고립, 그리고 종교적 환난의 압력 속에서도 사도들이 전한 말씀을 인간의 오만이 아닌 ‘성령의 기쁨’으로 온전히 받아들인 거룩한 남은 자(Remnant)들의 공동체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2절부터 10절까지 도도하게 흐르는 구속사적 서사는 단순히 한 고대 교회가 남긴 아름답고 낭만적인 종교적 미담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와 고린도의 사역지에서 밤낮 무릎을 꿇으며 감사하고 기억했던 것은, 그들을 짓누르던 역사적 고난이 마술처럼 하루아침에 사라졌다는 외적인 환경 변화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살을 에어내는 고난과 결핍의 한가운데서 성도들의 수고를 통해 믿음의 역사가 산출되고, 서로를 향한 헌신 속에서 사랑의 수고가 증명되며, 거친 압박 속에서도 소망의 인내가 삶의 구체적인 사건과 열매로 드러났다는 준엄한 신앙적 실상 때문이었습니다.

이 본문은 오늘의 교회가 과연 무엇을 기초로 세워져야 하며, 시대를 거스르는 풍파를 어떤 동력으로 견뎌내야 하는지를 고요하면서도 날카롭게 추적하는 깊이 있는 성경 묵상의 보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에게 이 땅 위에서 위기도 없고 상처도 없는 온실 속의 삶을 보장하겠다고 값싸게 약속하기보다,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와 위기 속에서도 결코 소멸하지 않는 부활의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겠다고 선포합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보낸 눈물의 기도를 지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 올린 감사는 결코 입에 발린 의례적인 칭찬이나 막연한 격려가 아니었습니다. 사도는 그 어린 성도들이 로마 제국의 칼날 아래서 어떤 숨 막히는 적대적 환경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신앙의 자리를 파수했는지 그 지독한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단지 종교적인 형식주의에 도취해 일시적인 열심을 부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존재적 가치관과 삶 전체의 방향을 창조주 하나님께로 완전히 급선회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목도했습니다.

그렇기에 세월의 강을 넘어 오늘날 우리에게 전달된 이 서신의 문장들은, 물질적 번영과 안일함에 취해 있는 현대 교회와 성도들의 심장을 향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뼈아픈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당신이 고백하는 믿음은 단지 햇살이 따스한 편안한 날에만 통용되는 유희의 언어인가, 아니면 삶의 모든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는 환난의 날에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만드는 실제적인 능력인가.”

1. 제국의 서슬 푸른 밤, 환난의 격랑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그리스도의 도(道)

고대 데살로니가는 로마 제국이 자랑하는 정교한 행정 질서와 세련된 헬라의 인문학적 문화가 실핏줄처럼 깊숙이 스며든 대도시였으며, 에그나티아 가로(Via Egnatia)라는 거대한 제국의 대동맥 위에 자리 잡고 있어 끊임없이 사람과 물자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무역의 활성화로 문명이 교차하는 그 길은 복음이 사방으로 빠르게 전파되는 신성한 통로가 되기도 했지만, 역설적으로 복음을 대적하는 유대 기득권층의 반대와 로마 황제 숭배 체제의 시퍼런 핍박이 가장 신속하고 잔인하게 번져나가는 증오의 통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도시에 당도하기 직전, 이미 빌립보 사역지에서 로마 관원들에게 옷이 찢긴 채 매를 맞고 깊은 차꼬に 갇히는 참혹한 고난을 겪은 상태였습니다. 육체는 상처투성이였고 영혼은 피로했을 테지만, 그는 데살로니가에 이이자마자 유대인의 회당으로 직행하여 오직 성경을 풀어 예수 그리스도가 왜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고난을 받아야만 했는지, 그리고 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만 했는지를 타협 없이 증언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 기록된 구속사의 도정 속에서 바울이 전한 전도와 설교는 청중들의 눈물샘만을 자극하는 일시적인 감정적 호소나 세련된 웅변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인류의 타락한 이성을 향해 메시아가 왜 영광의 왕좌가 아닌 수치스러운 도살장의 양처럼 고난을 겪어야만 했는지, 왜 저주받은 나무틀인 십자가가 역사의 실패가 아니라 인류를 죄에서 속량하시는 하나님의 유일하고도 거룩한 구원의 길인지를 구체적인 성경의 성취로 증명해 보였습니다.

나아가 죽음의 무덤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가 왜 유대인과 이방인을 불문하고 온 우주 만민이 붙들어야 할 최종적인 소망인지를 예리하게 풀어내었습니다. 당시 기득권 유대인들에게는 거치는 걸림돌처럼 보이고, 지적인 자만에 빠진 헬라 지식인들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게 들릴 수밖에 없었던 십자가의 복음이, 오직 은혜를 사모하던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심령 속에서는 거대한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그들의 마음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빛이 인간의 어두운 양심을 깨우고 영혼을 뒤흔들수록, 그 빛을 꺼뜨리려는 어둠의 세력과 종교적 반대자들의 광기 어린 폭동도 함께 일어났습니다.

폭도들의 위협으로 인해 바울과 그의 믿음의 동역자들은 결국 사역을 다 마치지도 못한 채 밤중에 도망치듯 도시를 떠나야만 했고, 영적으로 갓 태어난 데살로니가의 어린 교회는 어떠한 외적인 보호막이나 영적 지도자의 조력도 받지 못한 채 날카로운 환난의 칼바람 속에 홀로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교회의 간판이 내려지고 성도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파산 선고가 내려져야 마땅한 비극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와 교회사 가 증언하는 가장 경이로운 반전은, 그 어리고 가냘픈 교회가 제국의 압박 앞에서도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무너지지 않았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지상의 설립자들은 비록 그들 곁을 떠나 격리되어 있었지만, 그들이 눈물로 심었던 복음의 생명력은 결코 유한한 사람의 말이나 일시적인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환난과 핍박은 공동체의 외형을 흔들고 물질적인 토대를 빼앗아 갈 수는 있었을지언정,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 속에서 그들의 영혼 깊은 곳에 인쳐진 구원의 ‘큰 확신’과 하늘의 기쁨까지는 단 한 조각도 빼앗아 갈 수 없었습니다.

핍박이라는 거대한 그림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교회를 향해 두 개의 상반된 얼굴을 하고 다가옵니다. 한편으로는 연약한 육신을 가진 인간에게 극심한 두려움과 지울 수 없는 상처, 그리고 눈물을 남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식의 껍데기를 모두 벗겨내어 그가 고백하는 신앙의 중심이 과연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를 만천하에 정직하게 폭로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국가의 법률이나 세상의 우호적인 안전망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지 않고, 오직 살아서 역사하시는 복음 자체의磐石(반석) 위에 영혼의 닻을 내렸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비참한 고난의 소문보다, 그 고난을 넉넉히 이겨내는 거룩한 믿음의 소문을 제국의 전역으로 더 멀리, 더 강력하게 퍼뜨릴 수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질수록 산 위의 작은 등불이 수십 리 밖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듯, 환난의 한복판에서 묵묵히 드려진 그들의 아름다운 순종은 주변의 낙심해 있던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수많은 이웃 교회들에게 살아 숨 쉬는 거룩한 격려이자 위로가 되었습니다.

2. 관념의 종교를 뚫고 나오는 행동하는 신앙: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의 동역학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얼굴을 눈물로 기억하며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단을 쌓았던 궁극적인 이유는, 그들이 소유한 신앙이 사상가들의 메마른 논쟁이나 입술의 고백이라는 종교적 액자 속에만 갇혀 있는 가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역사(役事)로 폭발하듯 나타났고, 서로를 향한 은혜는 뼈를 깎는 수고로 변모되었으며, 내일을 향한 기대는 대가를 지불하는 인내로 깊어졌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단순히 교리적인 명제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수준의 안일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무덤을 깨뜨리신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오늘 나의 깨어진 삶의 한복판에서 실제적인 힘으로 신뢰해 내는 결단이었습니다. 그들이 보여준 사랑 또한 감정의 따스한 온기나 말로만 하는 축복의 수준을 넘어, 고난받는 형제와 자매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소유와 생명까지 기꺼이 내어주는 헌신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이 위대한 세 단어, 곧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단지 2,000년 전 초대교회의 바랠 대로 바랜 빛바랜 표어로만 박제해 두지 않습니다. 복음 안에서 참된 믿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을 오늘 내가 당면한 질병과 물질적 결핍, 그리고 사역의 위기 속에서 신뢰함으로 묵묵히 걸어가는 현재진행형의 발걸음입니다.

또한 진정한 사랑이란 당시 헬라와 유대, 명예로운 귀족과 비천한 노예, 유력한 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견고하게 서 있던 인간적인 신분과 계급의 장벽을 예수의 보혈로 깨부수고, 서로의 짐을 대신 짊어지는 구체적인 노동이자 수고입니다. 소망 역시 눈앞의 상황이 인간적인 수단으로 조금 더 나아지기를 막연하게 기대하는 세상의 값싼 낙관주의가 아니라, 역사의 종국을 완성하시기 위해 구름 타고 다시 오실 영광의 주님 안에서 역사의 종말을 오늘로 당겨와 버텨내는 거룩한 인내입니다. 그렇기에 데살로니가 교회는 개척된 지 수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주 젊고 연약한 공동체였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마게도냐와 아가야 전 지역의 믿는 자들에게 지울 수 없는 거룩한 이정표(Model)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의 본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들에게 임할 때 단지 현란한 서사나 “말로만” 이른 것이 결코 아니었다고 명확히 선언합니다. 그들의 강단과 심령 속에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과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 그리고 그 어떤 세상의 협박으로도 흔들 수 없는 천국에 대한 ‘큰 확신’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 위대한 고백은 물질주의와 형식주의에 물들어 강단의 생명력을 잃어버린 오늘의 현대 교회가 매일 선포되는 설교와 하나님의 말씀을 도대체 어떤 태도로 받아내야 하는지를 엄중하게 묻습니다.

종교적인 언어와 유창한 신학적 지식은 필요할지 모르지만, 생명이 거세된 말의 성찬만으로는 죄로 인해 죽어가는 영혼을 단 한 사람도 온전하게 세울 수 없습니다. 강단에서 전해진 십자가의 말씀이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서 피 묻은 순종으로 번역되고, 공동체 내부에서 서로를 향한 구체적인 은혜의 열매로 드러날 때 비로소 복음은 머리로 기억하는 죽은 ‘정보’가 아니라, 삶을 송두리째 바 가 뒤엎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하게 됩니다.

특히 사명이 흐려지기 쉬운 환난의 계절에, 성도들이 서로를 향해 쏟아내는 구체적인 사랑의 수고는 믿음이라는 고결한 가치가 개인의 내밀한 영적 세계 속에만 갇혀 이기적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거룩한 방파제가 됩니다. 제국의 서슬 푸른 칼날 아래서 함께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사랑이란 결코 시집이나 강연에 나오는 추상적인 미덕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해 쓰러지려는 지체의 손을 피가 통하도록 단단히 붙들어주는 실제적인 손길이요 노동입니다.

누군가의 육체적인 아픔과 가난의 무게를 자신의 일처럼 기꺼이 짊어지고, 박해의 두려움 앞에 믿음이 흔들려 연약해진 지체를 정죄하지 않고 눈물로 기다려 주며, 거친 세속 문화의 유혹 속에서도 서로가 바라보는 소망의 방향이 흐려지지 않도록 기도의 무릎을 함께 세워주는 것—이것이 바로 복음이 요구하는 사랑의 진짜 모습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온 지상의 교회 앞에 찬란한 본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골방에서 고백했던 영광스러운 신앙의 문장들을 자신들이 살아가는 공동체의 거친 삶의 언어로 완벽하게 번역해 냈기 때문입니다.

3. 우상의 제단을 허무는 전인격적 회개: 삶의 주권을 재정렬하는 순종의 좁은 길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보여준 극적인 변화는 영혼의 일시적인 감동이나 종교적인 카타르시스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삶을 회고하며, 그들이 자신들의 삶을 지배하던 온갖 화려한 헬라의 우상들을 미련 없이 내던져 버리고, 오직 살아서 역사하시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아왔다고 선포합니다.

당시 찬란한 그리스-로마 문화권의 한복판에서 자신이 평생 섬기던 우상의 제단을 허문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종교적 취향이나 취미를 바꾸는 가벼운 차원의 문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지탱하던 실존의 주인을 바꾸는 일이었으며, 인생에서 마주하는 두려움의 대상과 방향을 완전히 재조정하는 일이었고, 나아가 제국의 기존 경제 질서와 사회적 관계망이 집요하게 요구하던 충성의 맹세를 단호히 내려놓는 목숨을 건 결단이었습니다.

참된 기독교의 회개는 과거의 잘못을 단순히 후회하고 눈물 흘리는 일시적인 감정의 정화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나의 타락한 자아와 세상의 우상들을 향해 가던 걸음을 완전히 멈추고 돌아서서,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말씀 통치 아래 자신을 복종시키는 실제적인 순종으로 이어질 때, 회개는 비로소 한 인간의 존재적 ‘삶의 방향’이 됩니다.

장재형 목사의 강해 설교가 가리키는 복음의 무조건적인 은혜의 심오함이 바로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합니다. 하나님은 죄인 된 인간을 향해 그저 세상의 우상과 정욕을 무조건 버리라고만 다그치며 율법의 몽둥이를 휘두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가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를 말씀하시기 전에, 우리가 마땅히 왕으로 모시고 돌아가야 할 참된 아버지의 품이 어디에 있는지를 복음의 은혜로 먼저 밝히 보여주십니다.

우상을 떠나보낸 인간의 마음 자리는 결코 쓸쓸하게 비어 있는 공허의 폐허로 방치되지 않습니다. 온 우주에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 예배하고 섬기는 새 언약의 거룩한 질서와 영원한 생명의 기쁨이 그 빈자리를 터질 듯이 채우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보여준 피 묻은 순종은 주일 예배 때 부르는 찬송의 언어를 조금 세련되게 바꾸는 종교적 리모델링에서 끝나지 않았고, 그들이 발을 딛고 살아가던 가정과 일터, 그리고 공동체의 삶 전체의 체질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께로 인생의 닻을 옮겨 심은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이 주는 두려움과 탐욕스러운 욕망의 언어만으로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현대 성도들이 직면한 우상의 실체 역시 반드시 눈에 보이도록 정교하게 조각된 금이나 돌의 형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는 돈이라는 이름의 재물 신(Mammon), 세상이 보장해 줄 것 같은 가짜 안전망, 타인의 시선에 목을 매는 인정 중독, 끝없는 성공의 신화, 그리고 내일에 대한 실존적인 두려움 같은 보이지 않는 내면의 우상들에게 너무나도 쉽게 마음의 보좌를 내어 주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전서가 고발하는 전인격적인 회개의 메시지는 단지 2,0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한 도시에만 국한된 박물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날마다 살아있는 복음의 거울 앞에서 내 삶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뼈아프게 다시 묻고, 보이지 않는 탐욕의 우상들을 깨부수며 오직 참되신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자리로 끊임없이 돌아서는 회개의 도정은,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를 따르는 성도들이 걸어가야 할 가장 깊고 선명한 신앙의 출발선입니다.

4. 무덤을 깨뜨린 부활 신앙과 역사(歷史)를 관통하는 재림 소망의 종말론적 연대

데살로니가전서 1장이 거룩한 카메라의 초점을 마지막으로 맞추는 종착지는, 장차 하늘로부터 찬란한 영광 중에 강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성도들의 뜨거운 재림 소망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가슴에 품었던 이 종말론적인 재림 신앙은 결코 눈앞의 거친 현실과 역사적 책임을 무책임하게 팽개치고 산속으로 도망치는 광신적인 도피주의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역사의 궤적을 완성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공의의 주님을 확실히 믿었기에, 제국의 시퍼런 환난과 매일의 통증을 넉넉히 견뎌낼 수 있었으며, 장래에 임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온전한 구원의 약속 앞을 바라보았기에 오히려 오늘 하루의 삶을 더욱더 순결하고 거룩하게 붙들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소망이란 다가올 미래에 대한 막연하고 낭만적인 상상의 유희가 아니라, 부러진 무릎을 일으켜 오늘을 견디고 사명의 자리를 사수하게 만드는 실제적인 종말론적 핵에너지였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복음의 경종을 울리며 날카롭게 경계하는 것 역시, 역사적 책임감을 잃어버리고 균형을 상실한 채 시한부 종말론으로 치닫는 가짜 종말 의식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신실하게 기다린다는 영적 의미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의 노동과 삶을 포기하거나 알 수 없는 미래의 두려움에 갇혀 영혼이 마비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재림 신앙은 내게 주신 일상의 자리에서 형제를 더 깊이 사랑하고, 매서운 추위와 환난 속에서도 더 성실하게 십자가의 길을 견뎌내며, 낙심한 지체들을 하늘의 음성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구체적인 삶의 열매로 이어져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은 우리에게 인간을 위협하는 죽음의 권세와 세상의 압박이 인생의 최종적인 마지막 말이 결코 아님을 우렁차게 선포하며, 주님의 재림 소망은 이 역사의 최종 결론이 세상 권력자들의 손이 아니라 오직 신실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안에 있음을 고백하게 만듭니다.

그리스도교 신학 안에서 예수의 부활과 그분의 재림은 결코 서로 동떨어진 별개의 신학적 주제가 아닙니다. 무덤의 차가운 빗장을 깨뜨리고 사망 권세를 밟아 이기신 예수의 부활을 통과하여 믿기 때문에, 성도는 세상이 가하는 잔인한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절망의 감옥에 갇히지 않는 하늘의 자유를 누립니다. 또한, 그 사흘 만에 살아나신 예수가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을 간절히 기다리기 때문에, 성도는 현재의 역사 속에 만연한 부조리와 불의, 그리고 박해의 고통이 역사의 최종적인 결론이 아님을 확신하며 눈물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이 위대한 종말론적 소망은 우리가 겪는 육신의 고통과 눈물을 결코 가볍게 여기며 도피하게 만들지 않지만, 그 고통의 이름이 신자의 존재적 최종 이름이 되지 못하도록 마침내 승리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 우리가 마주하는 깊은 성경 묵상의 세계는, 현실의 아픔을 부정하거나 눈을 가려버리는 종교적인 위선이나 값싼 위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도리어 십자가의 렌즈를 통해 우리가 처한 현실의 겉껍질을 뚫고 들어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장 깊고 정확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영적인 개안(開眼)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고난은 분명 비참한 아픔이며, 제국의 조직적인 핍박은 교회의 공동체를 연약하게 만들고 파멸시키는 독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복음의 능력 안에서 그 혹독한 고난은 결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절망의 증거가 아니라, 도리어 내 안에 숨겨져 있던 보석 같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 그리고 소망의 인내가 세상 천하에 가감 없이 증명되고 드러나는 거룩한 기적의 자리로 뒤바뀌게 됩니다.

오늘날의 지상 교회 역시 데살로니가 교회가 남긴 찬란한 영적 거울 앞에서 자기 자신의 부끄러운 민낯을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아무런 대가도 지불할 필요가 없는 편안하고 안락한 날의 언어로만 십자가와 믿음을 값싸게 사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삶의 기반과 조건들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위기의 날에도, 형제를 향한 사랑의 수고와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한 소망의 인내를 삶의 궤적으로 뚜렷하게 남겨놓고 있습니까?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현대인들의 영혼을 향해 남기는 질문은 고요하지만, 그 어떤 칼날보다 예리하여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정말로 오늘 당신의 심령 속에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천둥 같은 능력으로 임했다면, 당신이 마주한 환난의 깊은 밤 속에서, 과연 당신의 삶은 누구를 향해 그 거룩한 부활의 빛을 발하고 있는가.” 이 준엄한 질문 앞에서, 성도는 오늘도 겸비하게 무릎을 꿇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다시 나아갑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환난의 밤에 우리에게 남겨준 ‘우상을 버린 회개’와 ‘역사를 뚫고 나오는 사랑의 수고’를 깊이 묵상할 때, 오늘날 당신이 처한 삶의 자리(가정, 일터, 혹은 사역의 골짜기)에서 여전히 은밀하게 마음의 보좌를 차지하려 드는 보이지 않는 ‘현대의 우상(안전감에 대한 집착, 타인의 인정, 미래에 대한 염려)’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내 힘이 완벽하게 소멸되는 듯한 그 고독한 한계의 자리에서, 당신은 어떻게 “주님 다시 오시며 부활의 주가 되신다”는 등불을 켜고 구경꾼의 자리에서 일어나 아귀까지 물을 채우는 순종의 걸음을 결단하고 계시는가요?

장재형 박사는 현장 선교와 디지털 미디어 사역을 통해 세계 여러 지역에 복음을 전해 왔으며, 그 사역의 열매로 지상명령에 헌신하는 많은 이들이 세워졌다. 이러한 선교적 비전을 바탕으로 올리벳은 처음에 선교사 훈련을 위한 작은 교회 학교로 출발했다. 이후 보다 체계적인 신학 교육과 선교 인재 양성을 위해 2000년 로스앤젤레스와 서울에 올리벳신학대학 및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학교가 성장하면서 장 박사는 2004년 샌프란시스코에 Olivet University를 공식 설립했다. 올리벳은 샌프란시스코의 다양성과 역동적인 환경 속에서 신학을 중심으로 음악, 저널리즘, 예술디자인, 기술 분야까지 교육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윌리엄 와그너 박사를 비롯한 교수진을 영입하며 교육 역량을 강화했고, 2005년에는 옛 UC 버클리 다운타운 익스텐션 캠퍼스로 이전해 대학으로서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다.

2006년 장 박사는 선교 사역에 더욱 집중하기 위해 총장직을 데이비드 제임스 랜돌프 박사에게 이양하고, 국제총장으로서 세계 선교 사역을 이끌었다. 이후 Olivet University는 2009년 기관 인증을 받았으며, 언어교육대학과 경영대학을 추가하고 학위 과정과 국제 협력 관계를 확대하면서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독교 교육기관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davidjang.org

prismpress.kr

절망의 끝에서 피어나는 은혜와 소망 – 장재형 목사 (Olivet University)

] 1654년 11월 23일 깊은 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자신을 덮친 압도적인 빛 앞에서 펜을 쥐고 떨리는 손으로 양피지에 짧은 글을 남겼다. “불. 철학자와 학자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차가운 교리와 이성의 논리로 가두어 두었던 신이 영혼의 심연을 태우는 실재로 다가왔을 때, 그는 비로소 참된 엎드림을 배웠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1장을 기록하며 토해낸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라는 탄식 역시 이와 같은 뜨거운 불의 고백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우리의 걸음을 멈춰 세운다. 그는 성경 묵상이 단지 지식을 축적하는 서재의 일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밑바닥을 흔들고 방향을 돌이키게 만드는 영적인 호흡이 되어야 한다고 촉구한다.

무너진 자리에서 피어나는 은혜의 섭리

로마서 9장부터 흐르는 바울의 논증은 이스라엘의 거절과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거대한 구속사의 물줄기를 관통한다. 절망이 가장 합리적인 결론처럼 보이던 시대, 엘리야는 황량한 광야의 흙먼지 속에서 홀로 남겨졌다는 고독에 짓눌려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러나 하늘의 대답은 인간의 비관적인 통계를 비웃듯,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을 숨겨 두셨다는 엄연한 섭리였다. 장재형목사는 이 남은 자의 신비가 인간의 탁월함이나 강인한 의지에 서 있지 않음을 명확히 짚어낸다. 만약 우리의 어떠함이 조금이라도 섞인다면 그것은 더 이상 온전한 복음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배신과 어둠의 역사 속에서도 철저한 주권으로 당신의 사람들을 남겨 두시며, 그들을 통해 다시금 생명의 서사를 이어가신다. 카라바조의 캔버스 위에서 말에서 떨어져 눈이 먼 사울에게 빛이 일방적으로 침입했듯, 은혜란 내 공로의 자리를 온전히 비워낼 때 비로소 밀려드는 하늘의 단독적인 선물이다.

풍요의 식탁이 영혼의 덫이 될 때

그러나 남은 자가 있다는 사실은 특권층의 우월감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오히려 초대받고도 그 잔치를 외면한 자들의 비극을 뼈아프게 비춘다. 성경은 귀가 닫히고 눈이 멀어버린 영적 마비 상태를 무겁게 경고한다. 승리와 안락함으로 가득한 밥상이 도리어 영혼의 발목을 잡는 올무가 될 수 있다는 시편의 인용은 서늘한 통각을 안긴다. 교회의 마당을 밟고 익숙한 제도의 울타리 안에 머문다고 해서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연합을 자동적으로 보증해 주지는 않는다. 풍요가 우리로 하여금 가난한 마음을 잃어버리게 할 때, 그 화려함은 곧장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이끌다 구덩이에 빠지는 참혹한 추락으로 이어진다. 진정한 신학적 통찰은 높은 곳을 향하던 우리의 시선을 꺾어,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오만함의 단상인지 십자가 앞인지 분별하게 만드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화려한 혼인 잔치의 식탁에 앉아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씻긴 예복을 입었는지 매 순간 돌아보아야 한다.

상실을 넘어 구원의 지평을 넓히시는 손길

바울의 시선은 절망의 끝에서 다시금 눈부신 반전을 향해 도약한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은 단순한 파국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구원이 이방인에게 흘러가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다. 인간의 실패와 죄악마저도 재료로 삼아 더 광활한 사랑의 무대를 열어 가시는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측량을 아득히 벗어난다. 장재형목사는 이 비극을 넘어선 구원의 역전극이 우리에게 깊은 순종과 겸손을 요구한다고 역설한다. 나에게 임한 긍휼은 누군가의 눈물과 십자가의 희생 위에서 피어난 꽃이다. 우리는 종종 내가 받은 빛을 자격증처럼 휘두르며 타인을 재단하는 영적 교만에 빠지곤 한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타인의 빈자리를 보며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려내시려는 하나님의 아픈 심장에 동참하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속 창조주의 손끝이 무력한 아담을 향해 능동적으로 뻗어오듯, 우리의 구원 역시 그 닿을 듯한 간극을 채우시는 절대자의 사랑으로만 완성된다.

결국 로마서 11장의 거대한 서사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라는 벅찬 찬양으로 수렴된다. 이는 단순한 이론적 결론이 아니라,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히 깨달은 자만이 부를 수 있는 영혼의 절창이다. 이 장엄한 말씀 앞에서 우리는 장재형목사의 권면을 따라 스스로의 영적 체질을 뼈아프게 직면하게 된다. 오늘 나의 신앙은 안락한 밥상에 취해 영적 감각을 잃어버린 채 굳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매일 새롭게 부어지는 자비 앞에 엎드려 진실한 회개와 소망을 빚어내고 있는가. 우리는 결코 스스로 서 있는 자들이 아니라, 긍휼이라는 이름의 끈에 간신히, 그러나 가장 안전하게 매달려 있는 남겨진 자들이다. 당신은 지금 그 은혜의 벼랑 끝에서, 잃어버린 자들을 향해 기쁨의 잔치 문을 열어두는 삶을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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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눈부신 순종 – 장재형 목사 (Olivet University)

밤공기는 서늘했고, 무성한 감람나무 잎사귀 사이로 스며든 달빛은 땅에 엎드린 한 남자의 굽은 등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제단에서 흘러내린 희생제물들의 붉은 피가 기드론 골짜기를 적시며 흘러가던 그 밤, 겟세마네에는 짙은 고독과 피비린내가 함께 고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눈꺼풀은 무거웠고 세상은 고요히 잠들었으나, 오직 단 한 사람만이 다가오는 우주적 비극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땅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패배자의 애처로운 뒷모습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가 잉태되는 치열한 영적 산고의 현장이었습니다.

붉게 물든 기드론 골짜기, 침묵 속의 거룩한 압착

겟세마네는 본래 아람어로 ‘기름을 짜는 틀’ 곧 채유소를 의미하는 장소입니다. 단단한 올리브 열매가 무거운 돌무게에 짓눌려 완전히 형체를 잃어버릴 때 비로소 맑고 순전한 기름을 내어놓듯,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혼을 무자비하게 짓누르는 고통의 압착기 속에서 순종이라는 거룩한 기름을 흘려보내셨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처절한 밤의 풍경을 세밀하게 조명하며,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자 하는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일깨웁니다.

수십만 마리의 어린 양이 피를 흘린 기드론 골짜기를 지나며 예수가 느꼈을 대속의 끔찍한 무게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붉은 골짜기를 유월절의 찬미를 부르며 둔감하게 건넙니다. 이 극명한 대비 속에서 장재형 목사가 던지는 화두는 묵직합니다. 신앙이란 그저 밝고 승리감에 도취된 종려나무 가지의 환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수는 내면의 가장 깊고 서늘한 어둠 속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 하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맡기는 처절한 결단 속에서 빛을 발합니다.

부서진 자아가 빚어낸 순종의 예술

영국의 탁월한 문학가이자 기독교 변증가인 C.S. 루이스는 그의 명저 『고통의 문제』에서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바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진정한 선물은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깊이 있게 통찰한 바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끊임없이 ‘나의 뜻’을 관철하고 스스로 왕좌에 오르려 하지만, 진정한 생명의 능력은 자아의 뻣뻣한 의지가 산산이 부서지는 그 균열의 틈새를 뚫고 스며듭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올리신 기도는 바로 이 위대한 ‘의지 포기’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아바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피할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하지 않은 이 자발적 선택이야말로, 닫혀 있던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핵심 열쇠였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를 통해 이 위대한 기도가 피도 눈물도 없는 강철 같은 초월성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합니다. 그것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시는” 극도의 인간적 연약함 한가운데서 피어난 눈물이었습니다. 자신의 흔들림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아버지께 가져가는 정직한 용기,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참된 신앙의 자세이자 가장 깊은 신학적 통찰의 결정체입니다.

한 시의 무너짐, 그 연약함을 끝까지 끌어안는 은혜

그러나 구원의 역사가 묵묵히 진행되며 온 우주가 숨죽인 그 ‘한 시(시간)’ 동안, 제자들은 육신의 얄팍한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듭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조차 겟세마네의 무거운 침묵과 고독을 뜬 눈으로 견디지 못했습니다. 홑이불을 버리고 벌거벗은 채 어둠 속으로 도망친 한 청년의 우스꽝스럽고도 비참한 모습은, 위기의 순간에 여지없이 찢겨나가고 마는 우리 인간의 비루한 민낯을 적나라하게 대변합니다.

하지만 복음서는 이들의 참담한 실패를 정죄하거나 조롱하기 위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실패의 밑바닥까지 기어이 찾아오시는 압도적인 은혜를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벼려진 시선은, 제자들의 무너짐이 자기 확신을 의지하는 얄팍한 종교심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고발한다고 봅니다. 동시에 “깨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탄식 어린 명령이 단순한 도덕적 수양을 넘어, 맹수처럼 달려드는 유혹 앞에서 영혼을 지켜내는 유일한 생존 처방임을 역설합니다. 우리는 깨어 엎드릴 때에만 비로소 유혹의 밤을 건널 수 있습니다.

슬픔 속에서 피어나는 영광의 새벽빛

“이제는 자고 쉬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길고 고통스러운 세 번의 기도를 마친 예수의 얼굴에는 더 이상 짙은 두려움의 그늘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환경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다가오는 무리들의 횃불과 창검은 여전히 위협적으로 번뜩였지만, 기도를 통해 내면의 방향타를 하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고정시킨 영혼은 폭풍의 한가운데서도 흔들림 없이 고요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기도가 우리 삶에 불어닥치는 고난의 사건 자체를 당장 멈추게 하지는 못할지라도, 그 사건을 맞이하는 우리의 영적 태도와 시선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다는 진리를 아름다운 성경 묵상으로 직조해 냅니다.

사순절의 깊은 밤, 겟세마네는 단지 이천 년 전 예루살렘의 외진 감람산 자락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질병의 고통, 가장 믿었던 이들과의 관계 단절,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삶의 막막함 앞에서 “어찌하여 내게 이런 쓰라린 잔을 주시나이까”라며 통곡하는 우리의 일상 한복판이 곧 겟세마네입니다. 그 차갑고 고독한 영혼의 밤에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십자가를 향한 초대는 우리의 굳은 가슴을 다시 뜨겁게 고동치게 합니다.

무너질 것만 같은 절망의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는 것. 이해할 수 없는 섭리 앞에서도 나의 아버지를 끝까지 신뢰하며 묵묵히 십자가의 길로 걸음을 내딛는 것. 이 좁고 외로운 겟세마네의 길을 통과할 때, 마침내 우리는 영광스럽게 쏟아지는 부활의 아침 빛을 온몸으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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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떨림이 멈춘 자리, 비겁한 권력은 언제나 ‘다음’을 기약했다 –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

장재형 목사

지중해의 습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이사랴의 총독 관저, 대리석 바닥 위로 무거운 침묵과 긴장이 감돕니다. 로마 제국의 위용을 자랑하는 독수리 문장 아래, 벨릭스 총독이 화려한 의복을 입고 앉아 있습니다. 그 맞은편에는 초라한 죄수복을 입은 사도 바울이 서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것은 제국의 법이 한낱 죄인을 심문하는 평범한 재판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을 뜨고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이곳은 세상의 가장 강력한 권력과 세상이 감당치 못할 진리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거대한 영적 전장(戰場)입니다.

화려한 언변 뒤에 숨겨진 차가운 낙인의 칼날

러시아의 사실주의 화가 니콜라이 게(Nikolai Ge)의 1890년작 <진리는 무엇인가?(What is Truth?)>는 이 법정의 풍경을 이해하는 데 놀라운 영감을 줍니다. 그림 속 빌라도는 화려한 토가를 입고 있지만 어두운 그림자 속에 서서 냉소적인 등을 보이고, 반면 초라한 예수 그리스도는 환한 빛 가운데 서서 침묵으로 진리를 웅변합니다. 가이사랴 법정의 풍경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변사 더둘로는 화려한 미사여구로 총독을 칭송하며 포문을 열지만, 그 혀끝에 숨겨진 것은 바울을 ‘염병(전염병)’이라 칭하고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낙인찍는 차가운 칼날이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사도행전 24장 설교를 통해, 이 ‘낙인찍기(Labeling)’가 고대 법정의 기술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상이 복음을 대하는 전형적인 방식임을 예리하게 포착합니다. 세상은 진리와 신학적 논쟁을 두려워하기에, 언제나 본질을 외면한 채 ‘사회적 혼란’이나 ‘체제 위협’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진리의 입을 막으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략 앞에서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임을 담담히 고백하며, 법정의 이슈를 사법적 차원에서 부활 신앙이라는 신학적 통찰의 차원으로 끌어올립니다. 이는 죄수의 비굴한 변명이 아니라, 세상의 법정마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선포하는 당당한 사자후였습니다.

어둠 속의 권력자, 빛 가운데 선 죄수

재판이 진행될수록 기이한 역전 현상이 일어납니다. 심판석에 앉은 벨릭스는 점점 불안해지고, 쇠사슬에 묶인 바울은 더욱 자유로워집니다. 바울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선처를 호소하는 대신, 도리어 총독 부부를 향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을 바울 사역의 절정이자, 권력을 향한 복음의 정면 승부로 해석합니다. ‘의’는 부패한 통치자를 향한 하나님의 기준이며, ‘절제’는 탐욕에 젖은 권력자를 향한 경고이고, ‘심판’은 제국의 법 위에 존재하는 영원한 대법원을 상기시키는 천둥과 같은 메시지였습니다.

니콜라이 게의 그림 속 빌라도가 진리이신 예수를 외면하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듯, 벨릭스 역시 바울의 메시지 앞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의 양심은 진리의 빛 앞에서 반응했습니다. 그러나 비극은 그 떨림이 회개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에 있습니다. 벨릭스는 말합니다.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장재형 목사는 이 ‘유예(Procrastination)’야말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영적 실수라고 지적합니다. 두려움은 은혜의 문턱이 될 수 있었지만, 그는 계산기를 두드리며 그 문턱을 넘지 않았습니다. 편의주의와 정치적 계산이 양심의 소리를 덮어버린 순간, 구원의 기회는 안개처럼 사라졌습니다.

“다음에 듣겠다”는 말은 영혼을 잠재우는 마취제다

벨릭스는 바울을 2년이나 구류해 두었습니다. 표면적으로 그것은 바울에게 억울한 ‘멈춤’의 시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의 깊은 성경 묵상은 그 2년의 침묵을 실패가 아닌 ‘숙성’의 시간으로 재해석합니다. 하나님의 시계는 멈춘 적이 없으며, 그 2년은 바울이 로마로 가기 전 복음의 정수를 더욱 단단히 다지는 준비의 기간이었습니다. 세상 권력은 뇌물을 바라고 시간을 끌었지만, 하나님은 그 시간을 사용하여 당신의 사도를 보호하고 단련시키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의 법정에 서 있습니까? 세상은 여전히 우리에게 ‘적당히 타협하라’고, ‘불편한 진실보다는 안전한 침묵을 택하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4장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벨릭스처럼 떨림을 느끼고도 ‘다음’을 기약하며 뒤로 물러설 것인가, 아니면 바울처럼 묶인 채로도 ‘의와 절제와 심판’을 말할 것인가. 장재형 목사가 전한 권면처럼, 신앙의 세계에서 ‘다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마음에 찔림을 주실 때, 바로 그 순간이 결단해야 할 ‘지금’입니다.

비겁한 권력은 언제나 편리한 훗날을 도모하지만, 참된 신앙은 불편한 오늘을 직면합니다. 우리의 일터와 가정, 그리고 사회라는 법정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화려한 변론이나 처세술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그 복음의 능력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케 합니다. 오늘도 세상의 판단 앞에서 위축되지 않고, 빛 가운데 선 바울처럼 당당히 진리를 살아내는 거룩한 용기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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