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끝에서 피어나는 은혜와 소망 – 장재형 목사 (Olivet University)

] 1654년 11월 23일 깊은 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자신을 덮친 압도적인 빛 앞에서 펜을 쥐고 떨리는 손으로 양피지에 짧은 글을 남겼다. “불. 철학자와 학자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차가운 교리와 이성의 논리로 가두어 두었던 신이 영혼의 심연을 태우는 실재로 다가왔을 때, 그는 비로소 참된 엎드림을 배웠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1장을 기록하며 토해낸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라는 탄식 역시 이와 같은 뜨거운 불의 고백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우리의 걸음을 멈춰 세운다. 그는 성경 묵상이 단지 지식을 축적하는 서재의 일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밑바닥을 흔들고 방향을 돌이키게 만드는 영적인 호흡이 되어야 한다고 촉구한다.

무너진 자리에서 피어나는 은혜의 섭리

로마서 9장부터 흐르는 바울의 논증은 이스라엘의 거절과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거대한 구속사의 물줄기를 관통한다. 절망이 가장 합리적인 결론처럼 보이던 시대, 엘리야는 황량한 광야의 흙먼지 속에서 홀로 남겨졌다는 고독에 짓눌려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러나 하늘의 대답은 인간의 비관적인 통계를 비웃듯,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을 숨겨 두셨다는 엄연한 섭리였다. 장재형목사는 이 남은 자의 신비가 인간의 탁월함이나 강인한 의지에 서 있지 않음을 명확히 짚어낸다. 만약 우리의 어떠함이 조금이라도 섞인다면 그것은 더 이상 온전한 복음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배신과 어둠의 역사 속에서도 철저한 주권으로 당신의 사람들을 남겨 두시며, 그들을 통해 다시금 생명의 서사를 이어가신다. 카라바조의 캔버스 위에서 말에서 떨어져 눈이 먼 사울에게 빛이 일방적으로 침입했듯, 은혜란 내 공로의 자리를 온전히 비워낼 때 비로소 밀려드는 하늘의 단독적인 선물이다.

풍요의 식탁이 영혼의 덫이 될 때

그러나 남은 자가 있다는 사실은 특권층의 우월감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오히려 초대받고도 그 잔치를 외면한 자들의 비극을 뼈아프게 비춘다. 성경은 귀가 닫히고 눈이 멀어버린 영적 마비 상태를 무겁게 경고한다. 승리와 안락함으로 가득한 밥상이 도리어 영혼의 발목을 잡는 올무가 될 수 있다는 시편의 인용은 서늘한 통각을 안긴다. 교회의 마당을 밟고 익숙한 제도의 울타리 안에 머문다고 해서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연합을 자동적으로 보증해 주지는 않는다. 풍요가 우리로 하여금 가난한 마음을 잃어버리게 할 때, 그 화려함은 곧장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이끌다 구덩이에 빠지는 참혹한 추락으로 이어진다. 진정한 신학적 통찰은 높은 곳을 향하던 우리의 시선을 꺾어,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오만함의 단상인지 십자가 앞인지 분별하게 만드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화려한 혼인 잔치의 식탁에 앉아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씻긴 예복을 입었는지 매 순간 돌아보아야 한다.

상실을 넘어 구원의 지평을 넓히시는 손길

바울의 시선은 절망의 끝에서 다시금 눈부신 반전을 향해 도약한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은 단순한 파국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구원이 이방인에게 흘러가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다. 인간의 실패와 죄악마저도 재료로 삼아 더 광활한 사랑의 무대를 열어 가시는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측량을 아득히 벗어난다. 장재형목사는 이 비극을 넘어선 구원의 역전극이 우리에게 깊은 순종과 겸손을 요구한다고 역설한다. 나에게 임한 긍휼은 누군가의 눈물과 십자가의 희생 위에서 피어난 꽃이다. 우리는 종종 내가 받은 빛을 자격증처럼 휘두르며 타인을 재단하는 영적 교만에 빠지곤 한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타인의 빈자리를 보며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려내시려는 하나님의 아픈 심장에 동참하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속 창조주의 손끝이 무력한 아담을 향해 능동적으로 뻗어오듯, 우리의 구원 역시 그 닿을 듯한 간극을 채우시는 절대자의 사랑으로만 완성된다.

결국 로마서 11장의 거대한 서사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라는 벅찬 찬양으로 수렴된다. 이는 단순한 이론적 결론이 아니라,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히 깨달은 자만이 부를 수 있는 영혼의 절창이다. 이 장엄한 말씀 앞에서 우리는 장재형목사의 권면을 따라 스스로의 영적 체질을 뼈아프게 직면하게 된다. 오늘 나의 신앙은 안락한 밥상에 취해 영적 감각을 잃어버린 채 굳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매일 새롭게 부어지는 자비 앞에 엎드려 진실한 회개와 소망을 빚어내고 있는가. 우리는 결코 스스로 서 있는 자들이 아니라, 긍휼이라는 이름의 끈에 간신히, 그러나 가장 안전하게 매달려 있는 남겨진 자들이다. 당신은 지금 그 은혜의 벼랑 끝에서, 잃어버린 자들을 향해 기쁨의 잔치 문을 열어두는 삶을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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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떨림이 멈춘 자리, 비겁한 권력은 언제나 ‘다음’을 기약했다 –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

장재형 목사

지중해의 습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이사랴의 총독 관저, 대리석 바닥 위로 무거운 침묵과 긴장이 감돕니다. 로마 제국의 위용을 자랑하는 독수리 문장 아래, 벨릭스 총독이 화려한 의복을 입고 앉아 있습니다. 그 맞은편에는 초라한 죄수복을 입은 사도 바울이 서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것은 제국의 법이 한낱 죄인을 심문하는 평범한 재판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을 뜨고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이곳은 세상의 가장 강력한 권력과 세상이 감당치 못할 진리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거대한 영적 전장(戰場)입니다.

화려한 언변 뒤에 숨겨진 차가운 낙인의 칼날

러시아의 사실주의 화가 니콜라이 게(Nikolai Ge)의 1890년작 <진리는 무엇인가?(What is Truth?)>는 이 법정의 풍경을 이해하는 데 놀라운 영감을 줍니다. 그림 속 빌라도는 화려한 토가를 입고 있지만 어두운 그림자 속에 서서 냉소적인 등을 보이고, 반면 초라한 예수 그리스도는 환한 빛 가운데 서서 침묵으로 진리를 웅변합니다. 가이사랴 법정의 풍경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변사 더둘로는 화려한 미사여구로 총독을 칭송하며 포문을 열지만, 그 혀끝에 숨겨진 것은 바울을 ‘염병(전염병)’이라 칭하고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낙인찍는 차가운 칼날이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사도행전 24장 설교를 통해, 이 ‘낙인찍기(Labeling)’가 고대 법정의 기술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상이 복음을 대하는 전형적인 방식임을 예리하게 포착합니다. 세상은 진리와 신학적 논쟁을 두려워하기에, 언제나 본질을 외면한 채 ‘사회적 혼란’이나 ‘체제 위협’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진리의 입을 막으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략 앞에서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임을 담담히 고백하며, 법정의 이슈를 사법적 차원에서 부활 신앙이라는 신학적 통찰의 차원으로 끌어올립니다. 이는 죄수의 비굴한 변명이 아니라, 세상의 법정마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선포하는 당당한 사자후였습니다.

어둠 속의 권력자, 빛 가운데 선 죄수

재판이 진행될수록 기이한 역전 현상이 일어납니다. 심판석에 앉은 벨릭스는 점점 불안해지고, 쇠사슬에 묶인 바울은 더욱 자유로워집니다. 바울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선처를 호소하는 대신, 도리어 총독 부부를 향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을 바울 사역의 절정이자, 권력을 향한 복음의 정면 승부로 해석합니다. ‘의’는 부패한 통치자를 향한 하나님의 기준이며, ‘절제’는 탐욕에 젖은 권력자를 향한 경고이고, ‘심판’은 제국의 법 위에 존재하는 영원한 대법원을 상기시키는 천둥과 같은 메시지였습니다.

니콜라이 게의 그림 속 빌라도가 진리이신 예수를 외면하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듯, 벨릭스 역시 바울의 메시지 앞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의 양심은 진리의 빛 앞에서 반응했습니다. 그러나 비극은 그 떨림이 회개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에 있습니다. 벨릭스는 말합니다.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장재형 목사는 이 ‘유예(Procrastination)’야말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영적 실수라고 지적합니다. 두려움은 은혜의 문턱이 될 수 있었지만, 그는 계산기를 두드리며 그 문턱을 넘지 않았습니다. 편의주의와 정치적 계산이 양심의 소리를 덮어버린 순간, 구원의 기회는 안개처럼 사라졌습니다.

“다음에 듣겠다”는 말은 영혼을 잠재우는 마취제다

벨릭스는 바울을 2년이나 구류해 두었습니다. 표면적으로 그것은 바울에게 억울한 ‘멈춤’의 시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의 깊은 성경 묵상은 그 2년의 침묵을 실패가 아닌 ‘숙성’의 시간으로 재해석합니다. 하나님의 시계는 멈춘 적이 없으며, 그 2년은 바울이 로마로 가기 전 복음의 정수를 더욱 단단히 다지는 준비의 기간이었습니다. 세상 권력은 뇌물을 바라고 시간을 끌었지만, 하나님은 그 시간을 사용하여 당신의 사도를 보호하고 단련시키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의 법정에 서 있습니까? 세상은 여전히 우리에게 ‘적당히 타협하라’고, ‘불편한 진실보다는 안전한 침묵을 택하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4장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벨릭스처럼 떨림을 느끼고도 ‘다음’을 기약하며 뒤로 물러설 것인가, 아니면 바울처럼 묶인 채로도 ‘의와 절제와 심판’을 말할 것인가. 장재형 목사가 전한 권면처럼, 신앙의 세계에서 ‘다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마음에 찔림을 주실 때, 바로 그 순간이 결단해야 할 ‘지금’입니다.

비겁한 권력은 언제나 편리한 훗날을 도모하지만, 참된 신앙은 불편한 오늘을 직면합니다. 우리의 일터와 가정, 그리고 사회라는 법정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화려한 변론이나 처세술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그 복음의 능력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케 합니다. 오늘도 세상의 판단 앞에서 위축되지 않고, 빛 가운데 선 바울처럼 당당히 진리를 살아내는 거룩한 용기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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