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 성경 묵상: 빌립보서 4장, 자족의 비결과 나눔의 은혜 (Olivet University)

장재형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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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는 석탄이 주인의 방에만 쌓여 있고, 서기는 꺼져가는 불씨 곁에서 추위를 견디는 장면이 나온다. 스크루지의 재산은 바로 옆에서 일하는 한 사람의 추위조차 덜어주지 못했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의 빌립보서 4장 설교는 이 장면 너머의 질문을 던진다. 얼마를 가졌는가보다, 가진 것이 우리 안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 묵상은 설교가 짚은 자족의 비결과 나눔의 은혜를 따라가 본다.

감옥에 전해진 선물, 그리고 오래 품어 온 마음

바울은 감옥에서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빌립보 교회의 선물을 받았다. 그 돈과 물품에는 바울의 필요를 기억하고 헤아려 온 성도들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0절에서 그 마음이 다시 싹튼 것을 기뻐한다. 오래 품었지만 표현할 기회가 없던 생각이 마침내 누군가의 손을 거쳐 그에게 닿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마음속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빌립보 교회는 복음이 시작될 때부터 바울과 주고받는 교제에 참여했고,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거듭 그의 필요를 도왔다. 한 번의 감동에 머물지 않고, 멀리 있는 한 사람의 삶을 자기 일처럼 돌보는 관계로 자란 것이다.

그렇다고 바울이 선물에 기대어 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궁핍해서 이 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힌다. 선물을 귀하게 받으면서도 그것에 매이지 않았고, 스스로 자족한다는 이유로 성도들의 사랑을 밀어내지도 않았다. 받은 것을 인정하는 겸손과 소유에 매이지 않는 자유가 그의 감사 안에 함께 있었다.

이 장면은 교회가 물질을 대하는 태도도 돌아보게 한다. 헌금과 구제, 선교 후원에는 돈이 필요하지만, 돈이 오간다는 사실만으로 사랑의 교제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서로를 향한 배려와 공평한 나눔이 있을 때 재정은 사랑을 전하는 구체적인 언어가 된다.

자족의 비결은 내 힘이 아니라 은혜에 있다

빌립보서 4장 11절에서 바울은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한다. 설교는 이 고백을 스토아 철학이 중시한 내면의 평정과 견주면서, 만족의 근원이 다르다는 점을 짚는다. 바울의 자족은 자기 수련으로 감정을 다스려 얻은 초연함이 아니다. 그의 중심을 붙드는 힘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자족을 십자가와 부활로 주어진 은혜에 연결한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소유로 증명해야 한다면 물질이 변할 때마다 자기 가치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정체성을 붙든 사람에게 재산의 크기는 삶의 최종 기준이 될 수 없다. 궁핍이 존재를 초라하게 만들지 못하고, 풍족함도 홀로 설 수 있다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바울이 자족을 ‘배웠다’고 말한 대목도 오래 읽을 만하다. 그의 고백 뒤에는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며 배고픔과 추위를 겪은 선교의 시간이 있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의 손쉬운 위로가 아니라, 여러 형편을 지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익힌 사람의 말이다. 자족의 비결은 어려움을 피해 간 자리가 아니라, 그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은혜에 머무는 자리에 있다.

이 문맥에서 빌립보서 4장 13절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는 고백을 읽어야 한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은 원하는 성공을 빠짐없이 얻는다는 약속이 아니다. 이 말씀의 중심은 모든 형편을 내 뜻대로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하는 믿음이다.

빈손에도, 넉넉한 손에도 믿음이 필요하다

자족은 부족할 때만 배우는 덕목이 아니다. 설교는 광야에서 물이 없다고 원망한 이스라엘과, 풍족해질 때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신명기 8장의 경고를 함께 떠올린다. 궁핍은 마음을 분노와 비굴함으로 기울게 하고, 풍요는 모든 것을 자기 힘으로 얻었다는 교만을 키운다. 서로 반대처럼 보이는 두 형편이 모두 하나님을 잊게 하는 시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소유에 매이지 않는 삶은 재산을 모두 버리는 행동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 설교가 요청하는 것은 무소유의 외형이 아니라, 돈이 신앙과 인격을 지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피는 성찰이다. 돈이 늘었다고 사람을 내려다보거나 줄었다고 자신의 존엄까지 낮추고 있다면,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돌아볼 때다.

이 성찰은 공동체의 삶으로도 이어진다. 예배 장소가 좁고 재정이 어려운 때에는 주어진 자리에서 감사하며 평안을 배우고, 형편이 넉넉해진 때에는 그 부요함을 하나님의 선물로 기억한다. 부족할 때 배운 의지함을 풍족할 때 잊지 않을수록 재물은 이웃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데 쓰인다.

나눔의 은혜는 하나님 앞에서 향기가 된다

바울의 시선은 이제 자신이 받은 선물에서 그것을 보낸 사람들의 삶으로 옮겨 간다. 빌립보서 4장 17절에서 그가 구하는 것은 선물 자체가 아니라 성도들에게 유익한 열매가 풍성해지는 일이다. 장재형 목사는 나눔이 받는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주는 사람도 헌신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영적 열매를 맺고, 함께 은혜의 풍성함을 누린다.

이어지는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표현은 이 주고받음을 하나님 앞에 놓는다. 빌립보 교회의 선물과 에바브로디도의 수고는 사람에게 베푼 호의를 넘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된다. 로마서 15장 27절에서 영적인 것을 나눈 이들이 물질로 서로를 섬기는 모습도, 공동체가 하나라는 고백이 행동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런 관계에서 헌금은 상대를 지배할 권리를 사는 값이 될 수 없다. 주는 이와 받는 이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형제자매이며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다. 가진 것이 많다고 우월해질 이유도, 도움이 필요하다고 비굴해질 이유도 없다. 자족은 사랑을 거절하는 독립이 아니며, 나눔은 상대를 지배하는 권리가 아니다.

설교가 떠올리는 사르밧 과부와 마게도냐 교회의 이야기는 이 헌신이 넉넉한 사람만의 몫이 아님을 보여준다. 마지막 가루와 기름만 남았던 과부는 엘리야의 말에 순종했고, 극심한 가난을 겪던 교회들도 다른 공동체를 위한 나눔에 참여했다. 그들은 사랑의 시작을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뒤로 미루지 않았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들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는 소망을 전한다. 이 약속을 주고받은 액수의 계산으로 줄여 버리면 서로를 세우는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놓치게 된다. 마지막에 남아야 할 것은 얼마를 주고 얼마를 받았는가를 적은 장부가 아니라, 그 관계 안에서 함께 경험한 은혜다.

편지를 닫는 바울의 축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성도들의 심령에 있기를 빈다. 물질과 헌신의 이야기가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위한 기도로 돌아온다. 이 묵상도 내 손에 남은 것만 헤아리던 시선을, 나를 붙드시는 주님과 곁에 있는 이웃에게로 옮기게 한다. 오늘 내게 주어진 것으로, 나는 누구의 필요를 기억하고 있는가.

장재형 박사는 현장 선교와 디지털 미디어 사역을 통해 세계 여러 지역에 복음을 전해 왔으며, 그 사역의 열매로 지상명령에 헌신하는 많은 이들이 세워졌다. 이러한 선교적 비전을 바탕으로 올리벳은 처음에 선교사 훈련을 위한 작은 교회 학교로 출발했다. 이후 보다 체계적인 신학 교육과 선교 인재 양성을 위해 2000년 로스앤젤레스와 서울에 올리벳신학대학 및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학교가 성장하면서 장 박사는 2004년 샌프란시스코에 Olivet University를 공식 설립했다. 올리벳은 샌프란시스코의 다양성과 역동적인 환경 속에서 신학을 중심으로 음악, 저널리즘, 예술디자인, 기술 분야까지 교육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윌리엄 와그너 박사를 비롯한 교수진을 영입하며 교육 역량을 강화했고, 2005년에는 옛UC 버클리 다운타운 익스텐션 캠퍼스로 이전해 대학으로서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다.

2006년 장박사는 선교 사역에 더욱 집중하기 위해 총장직을 데이비드 제임스 랜돌프 박사에게 이양하고, 국제총장으로서 세계 선교 사역을 이끌었다. 이후 Olivet University는 2009년 기관 인증을 받았으며, 언어교육대학과 경영대학을 추가하고 학위 과정과 국제 협력 관계를 확대하면서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독교 교육기관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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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의 역설, 쇠사슬도 매지 못한 복음의 자유와 은혜 – 장재형 목사 (Olivet University)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인간은 운명이라는 수레바퀴에 묶여 있으나, 그 안에서 영혼의 자유를 선택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로마의 차가운 감옥에서 써 내려간 빌립보서는 철학적 자족을 넘어선 뜨거운 생명력을 보여줍니다. 그의 손목을 묶은 것은 로마의 쇠사슬이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 쇠사슬의 마찰음은 복음이 로마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행진곡이 되었습니다. 갇힌 자가 밖에 있는 자를 위로하고, 결핍된 자가 풍족한 자에게 기쁨을 노래하는 이 경이로운 서신은 오늘날 장재형 목사의 설교를 통해 우리 시대 교회가 걸어가야 할 본질적인 궤도를 다시금 확인하게 합니다.

은혜가 평강을 낳고, 사랑이 분별을 세우는 신앙의 질서

바울의 모든 서신이 그러하듯 빌립보서의 문을 여는 열쇠는 ‘은혜와 평강’입니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수사가 아닙니다. 유대적 인사인 ‘샬롬’에 앞서 ‘카리스(은혜)’를 배치함으로써, 참된 평화의 근원이 오직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에 있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수많은 정보와 판단 속에서도 이 ‘복음의 순서’가 회복되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은혜가 전제되지 않은 판단은 날카로운 냉소가 되기 쉽고, 평강이 결여된 확신은 타인을 향한 공격성으로 변질될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분별력은 차가운 지성이 아니라, 지식과 총명 안에서 풍성해지는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사랑은 상대의 허물을 덮어주는 감상주의가 아니며, 진리는 상대를 배제하는 무기가 아닙니다. 진리는 사랑의 어조로 선포될 때 비로소 그 권위를 얻고, 사랑은 진리의 질서 안에서 작동할 때 미혹되지 않는 법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통찰처럼, 우리가 무엇을 믿고 보류할지의 갈림길에 섰을 때 붙잡아야 할 기준은 결국 “사랑이 지식과 총명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성도를 앞세우는 겸손, 낮은 곳으로 흐르는 리더십의 문법

빌립보 교회의 아름다움은 그 시작의 초라함과 대조를 이룹니다. 유대인 남자 열 명조차 모이지 않아 회당도 세우지 못했던 도시, 강가 기도처에서 만난 자주 옷감 장수 루디아로부터 시작된 이 공동체는 고난과 기쁨을 바울과 함께 나눈 동역자였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향해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종’이라 칭하며, 서신의 수신자를 호명할 때 ‘모든 성도들’을 가장 앞에 두고 ‘감독들과 집사들’을 그 뒤에 배치합니다. 이는 교회의 질서가 높낮이가 아닌, 섬김의 방향에 있음을 보여주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 기독교 리더십에 중대한 시사점을 던집니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듯, 목회자의 정체성은 직함이나 명예가 아닌 성도를 앞세우고 그들을 보호하는 섬김의 궤도 위에서만 증명될 수 있습니다. 지도자의 언어는 성도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붕대가 되어야 하며, 그의 결정은 약한 자를 지키는 방패가 되어야 합니다. 조직이 목적이 되고 권위가 군림이 될 때 교회는 생명력을 잃지만, 모든 직분이 성도를 향한 낮은 포복이 될 때 교회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하늘 시민권의 자부심, 땅의 윤리로 피어나는 의의 열매

당시 빌립보는 로마 황제에 대한 충성과 시민권의 자부심이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그 한복판에서 바울이 선포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고백은 매우 도전적인 사회적 발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하늘 시민권은 세상을 등지는 도피의 명분이 아니라, 오히려 이 땅에서 가장 정직하고 책임 있는 삶을 살게 하는 동력이 됩니다. 장재형 목사는 복음 안에서의 교제가 관념적 유희에 머물지 않고,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전달된 구체적인 나눔과 연대로 나타났음에 주목합니다.

참된 ‘의의 열매’는 숫자로 측정되는 성과나 외적인 평판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직과 책임, 온유와 진실, 그리고 십자가를 닮은 청지기직의 실천입니다.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은, 우리로 하여금 속도보다 진실을, 소문보다 실천을 선택하게 합니다. 리더십이 자기방어에 에너지를 쏟는 대신 성도의 성장을 돕고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데 모든 자원을 열 때, 공동체는 비로소 세상을 향해 ‘회개와 소망’의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 도덕적 권위를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묵상적 결말: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걷는 길

결국 빌립보서의 정점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를 사랑한다”는 바울의 고백에 닿아 있습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신 그분의 박동과 목회자의 심장이 일치될 때, 설교는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생명의 수혈이 됩니다. 교회는 실수를 용납할 수는 있으나 은폐를 용납해서는 안 되며, 회개의 쓴잔을 마시는 용기를 통해 은혜의 단맛을 세상에 증거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우리의 사랑은 지식과 총명 안에서 분별력을 갖추고 있습니까? 옥중에서 피어난 기쁨의 편지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쇠사슬이 복음을 묶지 못했듯, 우리 삶의 어떤 제약도 하나님이 시작하신 선한 일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을 당신은 신뢰하고 있습니까? 그분의 때에 반드시 완성될 그 나라를 바라보며, 오늘도 낮은 곳에서 묵묵히 ‘의의 열매’를 맺어가는 것만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유일하고도 영광스러운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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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통찰: 존재적 탕진을 넘어 아버지의 품으로 — 장재형 목사가 조명하는 ‘귀환의 복음’

📜 아우구스티누스의 갈망과 우리 안에 새겨진 귀환의 본능

4세기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저서 『고백록』의 서두에서 불후의 문장을 남겼습니다. “주여,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 살도록 만드셨으므로, 우리의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는 안식이 없나이다.” 이 고백은 천육백 년의 시간을 관통하여 오늘날 방황하는 현대인의 가슴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자신 또한 한때 쾌락과 지적 명예, 그리고 마니교라는 철학적 방황 속에서 자신의 생을 탕진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로마와 밀라노에서 세속적 성공을 쫓고 방종을 자유라 착각하며 표류하던 그는, 인생의 모든 밑바닥을 경험하고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떠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품으로 돌아오는 ‘회귀’에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의 복음 설교는 바로 이 지점, 인간 존재 깊숙이 내재된 ‘귀환 본능’을 날카롭게 파고듭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는 단순히 한 문제아의 가출 소동이 아닙니다. 이는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을 비난하던 바리새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본질을 가졌는지 보여주는 ‘하늘의 드라마’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 그리고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서기도 전부터, 이미 우리를 향해 먼저 달려오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 쥐엄 열매의 절망에서 발견한 은혜의 수직적 회복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상속 지분을 요구한 것은 당시 문화권에서 아버지를 죽은 사람 취급하는 극악한 패륜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고 자신이 주인 되는 세상을 꿈꾸며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예리한 신학적 통찰을 제시합니다. 탕자의 진짜 위기는 ‘재산의 파산’이 아니라, 아버지를 거부하고 스스로 자기 인생의 신이 되려 했던 ‘존재론적 파산’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조차 얻지 못하는 비참한 결핍 속에서, 아들은 비로소 ‘아버지의 집’을 기억해냅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라는 그의 독백은 단순한 후회가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 근원을 다시 인식하는 ‘영적 자각’입니다.

이 비유의 정점은 아들이 집에 도착하기도 전,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나가는 아버지의 모습에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죄의 목록을 묻지 않습니다. 그가 허비한 재산의 행방을 추궁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출 뿐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바로 복음의 심장이라고 강조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기는 행위는 끊어졌던 아들의 권리와 신분을 즉각적으로 복구시키는 ‘주권적 은총’의 선포입니다. 은혜는 자격을 갖춘 자에게 지불되는 보상이 아니라, 돌아온 자에게 쏟아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입니다.


🏚️ 집 안에 머무는 방황: 맏아들의 종교적 외로움

그러나 비유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집 안에 머물며 성실하게 아버지를 섬겼던 첫째 아들의 내면을 주목합니다. 동생을 맞이하는 잔치 소리에 분노하며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맏아들의 모습은, 오늘날 교회 안에 머물면서도 복음의 감격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초상일지 모릅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맏아들의 이 항변 속에는 하나님을 사랑의 대상이 아닌 ‘거래의 파트너’로 여기는 종교인의 민낯이 숨어 있습니다. 자신의 수고와 공로를 계산하고, 그 대가로 ‘염소 새끼 한 마리’를 요구하는 마음.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야말로 몸은 집 안에 있으나 마음은 아버지를 떠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방황’이라고 지적합니다.

아버지는 그런 큰아들에게도 다정하게 말합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이 이미 자신의 것이었음에도, 맏아들은 ‘내 몫, 내 지분, 내 권리’라는 좁은 계산법 속에 갇혀 아버지와의 친밀한 사귐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참된 신앙의 삶은 소유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그분의 기쁨에 동참하는 ‘청지기적 삶’임을 이 비유는 역설하고 있습니다.


⏳ 지금도 길 저편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

결국 탕자의 비유는 우리 모두를 향한 초청장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발견했듯, 인간의 영혼은 창조주라는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 결코 진정한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메시지를 오늘날의 공동체에 무겁게 적용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방황하다 지쳐 돌아오는 수많은 탕자들을 향해 조건 없이 달려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또한 우리는 맏아들처럼 자신의 의로움에 취해 아버지의 찢어지는 마음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복음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습니다. 아버지는 지금도 먼 길 저편, 당신이 나타날 그 지점을 응시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보이자마자 체통을 버리고 달려오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달려가며, 우리가 내딛는 회개의 한 걸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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