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통찰: 존재적 탕진을 넘어 아버지의 품으로 — 장재형 목사가 조명하는 ‘귀환의 복음’

📜 아우구스티누스의 갈망과 우리 안에 새겨진 귀환의 본능

4세기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저서 『고백록』의 서두에서 불후의 문장을 남겼습니다. “주여,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 살도록 만드셨으므로, 우리의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는 안식이 없나이다.” 이 고백은 천육백 년의 시간을 관통하여 오늘날 방황하는 현대인의 가슴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자신 또한 한때 쾌락과 지적 명예, 그리고 마니교라는 철학적 방황 속에서 자신의 생을 탕진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로마와 밀라노에서 세속적 성공을 쫓고 방종을 자유라 착각하며 표류하던 그는, 인생의 모든 밑바닥을 경험하고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떠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품으로 돌아오는 ‘회귀’에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의 복음 설교는 바로 이 지점, 인간 존재 깊숙이 내재된 ‘귀환 본능’을 날카롭게 파고듭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는 단순히 한 문제아의 가출 소동이 아닙니다. 이는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을 비난하던 바리새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본질을 가졌는지 보여주는 ‘하늘의 드라마’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 그리고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서기도 전부터, 이미 우리를 향해 먼저 달려오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 쥐엄 열매의 절망에서 발견한 은혜의 수직적 회복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상속 지분을 요구한 것은 당시 문화권에서 아버지를 죽은 사람 취급하는 극악한 패륜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고 자신이 주인 되는 세상을 꿈꾸며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예리한 신학적 통찰을 제시합니다. 탕자의 진짜 위기는 ‘재산의 파산’이 아니라, 아버지를 거부하고 스스로 자기 인생의 신이 되려 했던 ‘존재론적 파산’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조차 얻지 못하는 비참한 결핍 속에서, 아들은 비로소 ‘아버지의 집’을 기억해냅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라는 그의 독백은 단순한 후회가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 근원을 다시 인식하는 ‘영적 자각’입니다.

이 비유의 정점은 아들이 집에 도착하기도 전,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나가는 아버지의 모습에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죄의 목록을 묻지 않습니다. 그가 허비한 재산의 행방을 추궁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출 뿐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바로 복음의 심장이라고 강조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기는 행위는 끊어졌던 아들의 권리와 신분을 즉각적으로 복구시키는 ‘주권적 은총’의 선포입니다. 은혜는 자격을 갖춘 자에게 지불되는 보상이 아니라, 돌아온 자에게 쏟아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입니다.


🏚️ 집 안에 머무는 방황: 맏아들의 종교적 외로움

그러나 비유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집 안에 머물며 성실하게 아버지를 섬겼던 첫째 아들의 내면을 주목합니다. 동생을 맞이하는 잔치 소리에 분노하며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맏아들의 모습은, 오늘날 교회 안에 머물면서도 복음의 감격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초상일지 모릅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맏아들의 이 항변 속에는 하나님을 사랑의 대상이 아닌 ‘거래의 파트너’로 여기는 종교인의 민낯이 숨어 있습니다. 자신의 수고와 공로를 계산하고, 그 대가로 ‘염소 새끼 한 마리’를 요구하는 마음.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야말로 몸은 집 안에 있으나 마음은 아버지를 떠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방황’이라고 지적합니다.

아버지는 그런 큰아들에게도 다정하게 말합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이 이미 자신의 것이었음에도, 맏아들은 ‘내 몫, 내 지분, 내 권리’라는 좁은 계산법 속에 갇혀 아버지와의 친밀한 사귐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참된 신앙의 삶은 소유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그분의 기쁨에 동참하는 ‘청지기적 삶’임을 이 비유는 역설하고 있습니다.


⏳ 지금도 길 저편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

결국 탕자의 비유는 우리 모두를 향한 초청장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발견했듯, 인간의 영혼은 창조주라는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 결코 진정한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메시지를 오늘날의 공동체에 무겁게 적용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방황하다 지쳐 돌아오는 수많은 탕자들을 향해 조건 없이 달려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또한 우리는 맏아들처럼 자신의 의로움에 취해 아버지의 찢어지는 마음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복음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습니다. 아버지는 지금도 먼 길 저편, 당신이 나타날 그 지점을 응시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보이자마자 체통을 버리고 달려오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달려가며, 우리가 내딛는 회개의 한 걸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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