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1. 영생을 결정하는 지상의 삶

누가복음 16장에 기록된 두 개의 비유 중 앞부분에 등장하는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와, 뒷부분에 이어지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그 연장선상의 가르침을 깊이 들여다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을 사는 우리에게 삶의 방향과 태도를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삶의 중요성”과 동시에 “두 세계(이생과 저생)의 존재”를 진지하게 묵상하게 된다. 장재형목사 또한 여러 설교를 통해, 이 땅에서 살아가며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지혜롭게 행해야 하고, 가난한 자와 연약한 자에게 관용과 사랑을 베푸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임을 강조해 왔다.

먼저 앞부분의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를 간단히 살펴보면(누가복음 16:1-9), 주인은 청지기가 재물을 낭비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불러놓는다. 청지기는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낮춰 주며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푼다. 겉으로 보면 부정한 방법으로 경제적 손익을 조정한 것이 분명 옳지 않다. 그러나 주인은 청지기의 행동을 “지혜롭다”고 칭찬한다. 비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예화를 통하여 강조하시는 핵심 중 하나는 “이 땅에서 맡겨진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이다. 곧 물질 자체의 소유 여부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들을 다른 이들과 나누며 베푸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라는 점을 보여주신다. 성경은 우리가 가진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그저 청지기(관리자)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청지기가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유한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혜롭게 활용하는 모습은, 우리도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기회’와 ‘시간’과 ‘재물’을 선용하여,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교훈으로 이어진다.

이 비유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등장한다(누가복음 16:19-31). 이는 서로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별개의 예화가 아니라, “가진 자로서, 혹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떤 태도로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연장선상의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다.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즐겼다. 반면 나사로라는 거지는 온 몸에 헌데가 있고,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겨우 배를 채우려는 극도의 빈곤에 처해 있었다. 강아지들이 헌데를 핥을 정도로 비참한 상황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지상에서 살아가다가, 둘 다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여기서부터 놀라운 반전이 시작된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천국 같은 의미)으로 들어갔고, 부자는 음부(지옥)로 들어가 고통을 당한다.

이 비유는 “두 세계의 존재” 즉, 이생과 저생(죽음 이후의 세계)이 분명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사람들이 영원한 관점으로 현재의 삶을 바라보도록 가르치신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경험하는 지상의 삶이 전부가 아니며, 죽음 이후에 이어지는 영원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강조하는 핵심 가르침으로서,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저 세계에서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성경은 누누이 말한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하였고, 전도서 12장에서도 “육은 흙으로 돌아가되 영은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일깨운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설교에서, “우리가 눈에 보이는 현실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영원한 것들을 놓치기 쉽다”고 강조하며, “믿는 자들은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야 하고, 이 땅에서의 삶을 통해 영원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경종이기도 하다. 부자는 지상에서 호화롭고 풍족한 삶을 살았지만, 막상 죽고 난 이후에는 음부에서 고통에 빠진다. 질문이 생긴다. “왜 부자는 지옥에 갔는가?”, “이 비유가 말하는 바는 ‘가난해야만 천국 간다’는 뜻인가?” 물론 성경은 가난한 사람이 반드시 천국에 간다거나, 부자라고 무조건 지옥에 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욥기의 욥은 믿음이 좋았을 뿐 아니라 큰 재물을 가졌고, 아브라함 역시 부유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지옥에 간 것은 아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물질 자체”가 아니라, 그 물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마음,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는지 여부”에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누가복음 16장에서는 ‘부자가 자기 집 문 앞에 있었던 극빈자 나사로를 전혀 돌보지 않았다’는 현실이 강조된다. 거리는 매우 가깝다. 나사로는 부자의 대문 앞에까지 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는 그를 무시하고,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잔치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 부자가 표현하는 모습이 곧,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풍족히 누리면서도, 그 복을 나누려 하지 않는‘영적 자기중심성’을 가진 신자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때 나사로라는 ‘거지’는 상징적으로, 믿음에 굶주리고 말씀에 목말라 하는 자들, 혹은 물질적/영적으로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들을 나타낸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신자들이 부유함(물질적 풍족이든, 말씀의 풍족이든)을 누리게 되었을 때, 그 다음 단계로 반드시 ‘나눔과 섬김’이 따라야 한다고 자주 가르친다. 나사로를 외면한 부자의 비극은, 결국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복과 은사가 오로지 ‘자기 잔치’로만 소비될 때, 최후 심판 앞에서 얼마나 허무하고 두려운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나사로는 죽은 뒤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다.” 이는 유대인들이 “최고로 복된 상태” 또는 “천국”을 묘사할 때 즐겨 쓰는 표현이다. 반면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아브라함과 나사로를 본다. 그는 이렇게 부탁한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제발 나사로를 보내어 이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달라. 그리고 제 형제들에게도 나사로를 보내어 이곳에 오지 않도록 회개하게 해달라.” 그러나 아브라함은 단호히 말한다. “이미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어다.” 구약성경 전체, 곧 모세오경과 예언서들에 이미 메시아와 영원한 세계, 그리고 의인의 길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들이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설령 죽은 자가 살아나서 말을 전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라는 결론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실제로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를 죽음에서 살리셨을 때, 이것을 목격한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고 따르기도 했으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를 더 강화했다. 이는 “기적이나 초자연적 사건이 곧바로 인간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믿으려는 사람들은 믿음을 얻게 되지만, 이미 마음이 굳어버린 사람들은 기적에도 불구하고 더욱 강퍅해진다. 예수님은 “진정한 회심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죄를 깨닫고, 돌이키는 데서 온다”고 가르치신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에게는 이미 충분한 ‘말씀의 증거’가 주어져 있으며, 이를 듣고도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더 놀라운 표적과 기사가 발생해도 돌이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마지막 때에 임할 심판과 동시에 ‘이미 주어진 말씀의 빛’을 떠올릴 수 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복음 14:6)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향해 “내가 처소를 예비하러 가느니, 곧 너희를 위하여 천국의 길을 열기 위함이다. 그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 하신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 땅의 삶에만 몰두하여, 영원을 소홀히 하기가 쉽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단지 “부자가 지옥에, 거지가 천국에 갔다”는 수준의 단순 도식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태도로 지상의 삶을 보내며,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공의와 자비’를 얼마나 실천하는가에 따라 마지막 운명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엄중히 말해준다.

특히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 곧 목회자, 선교사, 신학자, 평신도 지도자 등은 모두 ‘부자’”라는 점을 자주 지적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물질적 풍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령 우리가 성경말씀, 신학적 자원, 신앙적 자유, 예배의 환경, 풍성한 설교와 교제 등 영적 자원을 많이 가졌다면, 그것은 곧 영적으로 부유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사로가 바로 눈앞에 있지만 외면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말씀과 은혜를 혼자서 누리기만 한다면, 그 결과는 부자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와 말씀, 지식과 교리를 제대로 분배하고 나누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은 오늘날의 교회와 각 개인에게 여전히 유효한 경종이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다면, 눈앞에 보이는 ‘나사로’를 외면할 수 없다. 나사로가 단지 밥을 못 먹고 있는 것인지, 혹은 영적으로 굶주려 있는 것인지, 혹은 고통받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인지, 사람마다 형편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주변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장)라고 가르치셨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도, “줄이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든 자에게 무엇을 하였느냐”가 심판의 중요한 기준 중 하나라고 말씀하신다. 이를 통해 볼 때, 지금 이 순간에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아니면 나 역시 잔치상만 바라보는 사람인지를 진지하게 점검해야 할 것이다.

이 비유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지점은 ‘죽은 뒤에는 운명을 뒤바꿀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말씀(마태복음 18장)이 바로 이를 가리킨다. 아브라함은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갈 수도, 너희가 여기로 올 수도 없다”고 말한다. 즉, 이 땅에서 회개하고 돌이키지 못하면, 저 땅에 가서는 이미 늦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구원받으면 되지 않느냐”는 안일한 태도는, 성경적 가르침 앞에서 상당히 위험한 생각일 수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간이 순간을 놓친다면 영원한 결정을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복음 전파’에 힘써야 한다. 이는 진정 사랑의 행위이다. 영원한 사후 세계와 하나님의 심판을 믿기에, 믿지 않는 자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동시에 믿는 이들끼리도 서로를 격려하며, 이제 막 믿기 시작한 형제자매들에게 말씀을 나누고, 그들이 영적으로 세워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가르치고 도와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결코 자기 만족에 그치지 말고, 복음서와 선교서를 통해 확인되는 ‘가르치고(제자 삼고), 선교하는 사명’을 적극 실천해야 한다고 누차 강조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도구 중 하나가 바로 ‘책(기독교 서적)의 나눔 사역’이다. 풍성한 교회와 신학교, 또는 신앙 공동체가 있는 지역에서 넘쳐나는 자료들을, 아직 말씀과 양서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곳으로 보내어 영적 양식을 공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 시대의 교회가 실천해야 할 ‘현대판 나사로 돕기’의 한 형태로도 볼 수 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주는 첫 번째 큰 교훈은, “우리는 모두 나그네이며, 죽음 이후의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 복음서의 예수님 말씀, 사도들의 전언은 일관되게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므로, 현세에서의 삶을 통해 영원을 준비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얼마나 교만해지고, 안일해지기 쉬운지를 되돌아보면, 이 메시지가 우리의 신앙에 얼마나 절실한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 교훈은, “우리에게 있는 것들을 나누며 살아야 한다”이다. 재물만이 아니다. 말씀, 은사, 지식, 재능 등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풍성함이 있다면, 그 복을 혼자서 소모하거나 자기 교회, 자기 모임 안에서만 소비하지 말고, 문 밖의 나사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곧 ‘복음적 삶의 증거’이며, “천국의 세계관을 가진 이가 필연적으로 드러내야 할 모습”이라고 역설한다.

더 나아가, 이 비유에서 부자는 “내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야고보서 3장에서 “혀는 곧 불이며,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는 지옥 불에서 난 것”이라 일컬을 만큼, 혀는 죄를 범하는 핵심적 도구가 된다. 부자의 “혀”는 지상에서 어떠했을까? 나사로를 멸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며, 자신의 즐거움과 자랑을 일삼던 모습으로 묘사되지는 않았을까? 정작 나사로의 존재를 무시하고 방치했던 부자는, 죽음 이후에야 “혀가 말라버리는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것이 단순한 상징이든 실제든, 중요한 것은 우리 삶에서 ‘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혀로 누군가를 살릴 수도 있고, 혀로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 고통받는 이에게 위로를 건네고 그를 도울 수도 있지만, 정죄와 비난, 욕설과 거짓말로 상처를 줄 수도 있다. 부자의 혀는 지상에서 나사로에게 사랑을 베푸는 말, 혹은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지시를 전혀 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것을 곱씹으며, “과연 지금 내 혀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를 스스로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

한편,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공평하시다’는 진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부자가 이 땅에서 좋은 것을 받았다면,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죽음 이후에는 반대가 되어 나사로가 위로를 받고 부자가 괴로움을 받는다(누가복음 16:25). 이것을 단순히 ‘공평’이라는 잣대로만 해석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지만, 분명 하나님은 “세상의 논리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심을 암시한다. 인간의 시선으로는 지금 당장의 현실이 불공평해 보일 수 있어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에 옳은 판단을 내리신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 12:21)는 말씀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여러 부조리와 모순을 마주하더라도 낙심치 않는 이유는,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온전히 보상하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믿기에, 나사로처럼 고난을 받는 이들도 마지막을 소망하며 견딜 수 있고, 부자처럼 이 땅에서 풍족한 이들도 자만하지 않고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며 베풀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부자가 부탁한 내용—“나사로를 보내어 형제들이 회개하게 해달라”—는 겉보기엔 형제들을 배려하는듯한 행동이다. 그러나 이미 주어진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아무리 극적인 체험(죽은 자가 살아나서 전해주는 메시지)이 추가로 주어져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 아브라함의 대답이다. 이는 기적이 아니라 말씀을 믿는 신앙이 본질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기적이나 표적만 쫓아다니다가, 말씀이 실제로 선포되고 가르쳐지는 자리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표적에서 믿음’이 아니라, ‘말씀에서 비롯되는 믿음’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여러 곳에서, 표적을 보이실 때마다 “너희가 표적을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는다”(요한복음 4:48)고 한탄하셨고, “말씀을 믿는 자가 복되다”고 선언하셨다(요한복음 20:29). 장재형목사 또한 기적 중심의 신앙이 아닌, 말씀 중심의 바른 신앙을 가질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표적은 일시적이고 보조적인 것이지만, 말씀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말씀 안에 기초한 신앙은 폭풍이 불고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죽은 자에게서 살아온 사람”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손에 주어진 “성경”을 펼쳐서, 그 안에 담긴 복음의 메시지를 똑바로 듣고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이 땅에서 저 땅(천국)으로 옮겨가는 유일한 길이며, “청지기의 지혜”를 실천하는 방법이다. 이 땅에서 매여 있던 것들, 예를 들어 물질적 집착, 이기적 야망, 남을 판단하고 미워하는 마음 등을 풀어내고, 대신 사랑과 나눔, 관용과 겸손을 매어두는 것이 곧 천국의 가치관을 소유한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삶을 살 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 땅에서 부분적으로 임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사람은, 죽음 이후 영원한 나라에서도 풍성한 상급을 누리리라는 것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전하는 핵심 메시지다.

이제 우리는 이 가르침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을 넘어, 실제 삶에서 적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허락하신 물질적 풍요가 있다면, 주변의 나사로에게 나누어줄 마음이 있는지 살펴보자. 내가 영적으로 부유하다고 생각한다면, 혹은 신학적 지식이 많다고 생각한다면, 그 지식으로 누구를 가르치고 일으키고 있는가를 돌아보자. 만일 내가 나사로처럼 헐벗고 굶주려 있다면, 하나님 앞에 무조건 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왜 이 길을 지나게 하시는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 하는지’를 살펴볼 필요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이 땅에서 낮아지고 가난한 자로 머무르면서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바라보는 이에게 ‘하늘의 복’이 있다는 희망을 전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평하시며, 마지막 심판의 날에 진실로 의를 따라 갚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의 설교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각 사람의 수고를 절대 잊지 않으신다”고 반복적으로 가르쳐왔다. “차가운 물 한 잔을 대접한 것까지도 주님께서 기억하시고 갚아주시는 분이다. 하물며 우리가 영혼을 살리고자 복음으로 돕고, 말씀으로 섬기고, 물질로 함께하는 수고를 주님이 모르실 리 없다. 이 땅에서 보상을 전부 받지 못할지라도, 저 하늘에서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이 주요 강조점이다. 이런 확신이 있기에, 우리는 구제와 선교, 교육 사역 등 다양한 형태로 이웃을 돌보는 일에 힘쓸 수 있다. “북 스토어 사역”이라는 구체적인 예에서도 보듯, 한 권의 기독교 서적이, 영적으로 목마른 누군가에겐 구원의 단서가 될 수 있다. 이미 복음의 풍성함을 누리고 있는 이들이 “책을 모으고, 분류하고, 배송해주는 수고”를 통해, 가난한 이들이 영적 자원을 얻게 된다면, 그 수고는 하늘에 쌓이는 보물이 될 것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1) 영원한 세계, 곧 죽은 뒤 심판과 천국·지옥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삶이 그것을 결정한다는 점을 강력히 일깨워준다. 2) 두 번째로, 우리가 이 땅에서 ‘부자(영적·물질적 부유)’가 되었다면 반드시 나누고 베풀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부자가 되었다는 것은 돈이 많다거나, 교회 내에서 높은 직분을 가지고 있다거나, 성경을 많이 읽고 신학적 지식이 많다는 식의 다양성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 어느 형태이든 간에 “주어진 것을 이웃과 나누지 않고 자기 만족에만 몰두한다면”, 그 끝은 부자가 갔던 길과 다르지 않을 수 있음을 경고한다. 아울러 그것이 곧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 예수님께서“자신의 소유라고 착각하지 말고 가난한 자를 위해 써라”라고 하신 말씀과 직결된다.

부자가 마지막에 자신의 형제들을 구원하기 위해 “나사로를 보내달라”고 간청하는 대목은, 사실상 “죽은 다음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 친척, 친구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바로 지금” 해야 한다. 죽은 뒤에는 건너갈 수도, 다시 내려갈 수도 없다. 그리고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이미 모세와 선지자들, 곧 구약성경과 신약계시 그리고 교회의 수많은 설교와 가르침을 통하여 “충분한 빛”을 받았다. 믿지 않는 것은 더 이상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강퍅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도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믿지 않았다. 심지어 로마 병정들이 빈 무덤을 보고 놀라서 달려갔음에도, 이 사실을 숨기려 돈으로 매수하며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갔다”고 거짓 보고를 만들어냈다. 기적이 부족했던 게 아니다. 마음이 굳어 있었기에, 아무리 기적이 일어나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내게 좀 더 확실한 표적을 보여주시면 믿겠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말씀에 기록된 진리가 이미 충분히 증거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말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믿음의 증거를 드러내야 한다. 장재형목사가 이러한 측면에서 자주 인용하는 구절 중 하나가 바로 로마서 10장 8-9절인데,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우리 곁에 있고, 그 진리에 입을 열고 마음을 열면 누구든지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리고 구원받은 이들이 합심하여, 아직 말씀을 모르거나, 영적으로 굶주린 ‘나사로들’을 돌보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누가복음 16장의 이 두 가지 비유(옳지 않은 청지기와 부자와 나사로)는 모두 “지혜롭게 사는 길”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이라 할 수 있다. 이 땅에서 재물이든 은사든 무엇이든 맡겨진 자들이라면, 결국 우리는 언젠가 결산할 날이 온다. 또한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므로, 이 땅에서의 모든 결정과 행동이 영원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거듭 강조하시는 ‘나눔의 중요성’이 더해지며, 부자의 사례를 통해 경고하신다. “문 앞에 있는 나사로를 외면하지 말라.” 우리가 문만 열면 만날 수 있는 여러 나사로들에게, 과연 얼마나 다가가고 있는지, 얼마나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만약 아무도 문 앞의 나사로를 돕지 않는다면, 이런 교훈을 들어도 그저 흘려버린다면, 결국 부자가 맞이한 음부의 고통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 비유의 결론이다.

이렇게 볼 때, 누가복음 16장의 메시지는 2천 년 전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부유하든 가난하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해당된다. 영원과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다면, 우리는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져야 한다. 이 땅이 전부라고 여기는 자들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다른 삶의 방식을 추구해야 한다. 흙으로 돌아갈 육체가 아니라, 영원히 주님 앞에 설 영혼을 위해 깨어 있어야 한다. 동시에 재물이 주어졌든, 말씀과 영적 풍요가 주어졌든,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것이 이생에서 준비되어야 할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문제임을,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힘주어 가르치신다.

장재형목사는 누가복음 16장에 대한 설교에서, “하늘의 시선을 가진 자는 필연적으로 이웃의 피로를 느끼게 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은 늘 한 영혼 한 영혼에 관심을 두고 계시고, 그 마음을 품는 자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일 전혀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나사로를 아예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라면, 그것은 이미 내 마음이 ‘영적인 교만’ 내지 ‘무감각’에 빠진 것이고, 회개해야 할 시점이라는 뜻이다. 부자는 원하든 원치 않든, 죽음 이후에 자신의 돌이킬 수 없는 상태를 직면했지만, 우리는 아직 이 땅에서 숨 쉬며,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복음을 전할 수 있고, 섬길 수 있는 시간적 유예를 가지고 있다. 이 시간은 길지 않고, 언젠가 끝난다. 그러므로 부자와 나사로 비유는 우리의 남은 삶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자 기회이기도 하다.

2. 부자의 책임과 나사로의 소망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확장해 해석하면, 단지 물질의 부자와 가난한 자만을 다루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말씀의 부요’를 가진 자와 그것을 받지 못해 배고파하는 자의 구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나 신자들은 어떤 모습일까? 정말 이 땅에는 여전히 ‘부자’와 ‘나사로’가 함께 존재한다. 한쪽에서는 풍성한 말씀, 수많은 기독교 서적, 다양한 세미나와 컨퍼런스를 통해 풍족한 영적 양식을 누리는가 하면, 다른 한쪽은 성경 한 권조차 구하기 어려운 지역에서 영적 기갈에 허덕인다. 또는 도심의 대형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화려한 찬양과 강력한 사역들이 있는 반면, 도시 변두리나 시골 지역, 혹은 다른 나라의 황폐한 마을에는 아직 복음이 전혀 미치지 못한 곳도 많다.

이를 직면한 장재형목사는 “우리는 곧 ‘영적 부자’이며, 우리가 나서서 ‘영적 나사로’를 돕지 않으면 큰 문제”라고 거듭 설파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 선교 활동이나 문서 사역을 살펴볼 때, 사실상 영어권을 비롯한 서구의 교회와 신학 기관들에는 수많은 책이 쌓여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보물 같은 자료들이 정작 영적 양식을 찾는 이들에게 도달하기 전에 폐기되거나, 헐값에 버려지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반면 인도, 아프리카, 동남아 등 많은 나라에서는 신학교를 세워도 도서관을 채울 책이 없어서, 학생들이 제대로 된 연구나 공부를 진행하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이 현상은 비단 책만의 문제가 아니다. 물리적 자원, 재정, 교육, 의료, 복지 등 다양한 차원에서 “부자와 나사로”가 공존한다.

성경적 원리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일하시고, 교회를 통해 사랑을 흘려보내신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돌보며, 병든 이들을 찾아가는 것을 매우 중요한 사명이라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5장에 등장하는 양과 염소의 비유는,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는 선언으로 요약된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구체적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예가 바로 이 말씀이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나눔이지만, 그것이 나사로가 살아가는 데 결정적인 도움일 수 있다. 더 나아가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것은, 곧 예수님에게 하듯이 행동하는 것이라 성경은 말한다.

이 ‘나눔’이 단순히 “내가 가진 것으로, 부족한 자를 잠시 돕는다”라는 시혜적 관점에서만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진정한 나눔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이 사람이 어떻게 하면 온전히 회복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데서 출발한다. 단순히 물질적 지원만 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제자로 세우고, 그가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보다 넓은 의미의 섬김이 요청된다. 이것이“영혼을 구원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사역”이다. 때문에 교회는 기도와 헌신, 그리고 사람을 세우고 훈련하는 과정을 동시에 감당해야 한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속 부자가 간과했던 것은, “문 앞에 있는 나사로의 영혼과 육신을 다 돌봐야 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부자가 그 책임을 인식했다면, 그에게 있어선 단순히 부스러기를 던지는 시혜를 넘어, 나사로의 근본 문제(병과 굶주림)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현대의 선교와 구제 사역 가운데서도, 단기적인 접근이 아닌 장기적 차원의 발전 전략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단기 선교나 구제금 지원 등은 중요한 시작점이 될 수 있으나, 결국 그 지역 사람들이 말씀을 배우고, 스스로 교회 공동체를 세우며 자족하며, 또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만드는 체계가 필요하다. 이것이 곧 “지혜로운 청지기”의 태도이며, 예수님의 “지상명령(마태복음 28장)에 충실한 사역”이라 볼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차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단순히 교세 확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고, 듣는 이들이 실제로 변화되어, 또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로 자라가는 것”이라고 해설한 바 있다. 특히 말씀을 담은 서적과, 그 서적을 읽고 공부할 수 있는 교재, 그리고 이를 가르칠 교사와 지도자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부자와 나사로”라는 다소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셨을까? 이는 인간의 시선을 확실히 붙잡기 위함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흔히 범하는 실수 중 하나는, “현재의 삶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부자는 자신이 이미 얻은 재화와 위치를 당연하게 여기고, 더 나아가 영적인 책임이나 소명을 외면한다. 그러나 이 땅의 재물과 지위는 죽음 앞에서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이 “내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사용했느냐”에 따라, 심판대 앞에서의 평가가 완전히 달라질 뿐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땅에서 누린 것이 클수록, 하나님 앞에서 나누어준 것의 여부가 더 철저히 검사될 것”이라 경고하면서, 우리에게 “깨어 베풀고, 여유를 남에게까지 확장시키는 삶”을 권면한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단순히 지옥과 천국이라는 ‘공포’와 ‘희망’의 대비가 아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영적 부자가 되었을 때, 문 밖에 있는 영적·물질적 가난한 자들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실천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전통적으로 교회가 강조해 온 “사랑과 자비”는 결코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다. 실제 생활에서, 그리고 전 세계 선교 현장에서 구현될 수 있는 실천적 가치다. 내가 가진 떡 한 조각, 헌 옷 한 벌이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양식일 수 있고, 더 나아가 복음서 한 권, 신학 서적 한 권이 누군가에게는 영원한 운명을 바꾸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사랑은 행동으로 증명된다”는 유명한 문장은,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기인한다.

이 비유가 계속해서 말하는 “두 세계(이생과 저생)”에 대한 인식은 우리 인생관의 근본 골격을 바꾼다.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면, 사람들은 당장 눈앞의 이익과 쾌락을 추구하며 살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영원”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고, 죽음 뒤에 하나님 앞에 선다는 두려움 혹은 경외심을 갖게 만든다. 그리하여 지금 이 땅에서의 태도와 행실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는 윤리나 철학의 차원을 넘어, “신앙”이라는 절대적인 이유가 뒷받침한다. 장재형목사는 설교에서 “현세적 만족을 넘어서 천국의 기쁨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자처럼 “그 손가락에 물을 찍어 혀를 서늘케 해달라”고 애걸하게 될 영원한 고통을 맞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비유가 주는 최종적 결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이 땅의 삶은 유한하며,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따른다. 둘째, 우리가 이 땅에서 가난하고 헐벗은 나사로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거스르는 것이며, 마지막 날 큰 책망에 이를 수 있다. 셋째, 이미 우리 손에 모세와 선지자들, 그리고 복음서와 사도들의 증언이 주어져 있으므로, 변명할 여지가 없다. 넷째, 진정한 회심과 섬김은,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가운데 일어난다. 다섯째, 살아 있을 때 결단하지 않으면, 죽은 이후에는 변경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 여섯째, 그리스도인의 부요함은 물질의 유무만이 아니라, 영적·말씀적 풍성함까지 포함한다. 이 부요함은 반드시 나눔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일곱째,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여러 영적 스승들이 가르치듯, 우리가 “북 스토어 사역” 등 구체적인 나눔의 장을 마련하고, 전 세계의 나사로들을 돕는 것은 ‘복음적 실천’이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이 “영원”과 맞닿아 있음을 환기해주며, 우리의 삶과 태도, 심지어 마음의 동기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점검하도록 이끈다. 우리의 재물과 지식과 힘이 오로지 자신만을 만족시키는 데 쓰인다면, 결국 그것은 심판 날에 우리에게 짐이 될 수 있다. 반면, 그것들을 통해 나사로를 살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는 통로가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늘에 상급을 쌓는 길이 된다. 신앙생활이란 단순히 예배당에 출석하는 일이 아니라, ‘영원’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의 윤리에 따라 사는 행위다. 그리고 그 윤리의 핵심이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태복음 10:8)는 주님의 말씀에 담겨 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며 부딪히는 수많은 고민들, 예컨대 “인생의 목표”, “가치관”, “직업 선택”, “재물의 사용”, “시간과 재능의 투자” 등등은 결국 이 비유 속 메시지와 직결된다. 부자처럼 이생에서만 만족하고자 하는지, 아니면 나사로처럼 비록 고난 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마지막 위로를 소망하는지, 또는 내가 부자라면 주변의 나사로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날마다 묻고 답해야 한다. 결단을 미루지 말아야 한다. 삶이 언젠가 끝난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죽음 이후에 맞이할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믿기에, “오늘”이라는 시간이 소중하다. 지상의 나그네 길을 마칠 때, 아브라함의 품으로 인도되는 사람이 될 것인지, 음부의 불꽃에서 혀를 식히려 애원하는 사람이 될 것인지, 바로 누가복음 16장이 던지는 묵직한 질문이다.

이처럼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시선”을 기반으로 한 인생관과, 그 인생관에 따라 실천해야 할 사랑과 나눔의 행동을 강력하게 설파한다. 또한 “지혜로운 청지기”의 비유가 그 바로 앞에 배치됨으로써, 예수님은 우리가 가진 것(물질, 재능, 지식, 영적 부요 등)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사용하라는 가르침을 강화하신다. 부정하게 보이는 방법을 쓴 옳지 않은 청지기도 “주어진 상황에서 최대한으로 이익을 준비했다”는 이유로 주인에게 지혜롭다고 칭찬을 받았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사람들은“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돕고, 복음을 전하고, 이웃과 은혜를 나누는 일”에 얼마나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겠는가?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 지혜”이며,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설교자들이 교회에게 촉구하는 바이다.

누가복음 16장은 “이 세상에서 부를 누리고 있다면, 그것으로 아버지의 마음처럼 사랑을 실천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지혜를 칭찬하실 것이다”라는 주님의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그 핵심은 결국 사랑과 자비, 그리고 천국 소망이다. 이 비유에 담긴 다차원적인 메시지를 기억하며, 각자에게 맡겨진 가정, 일터, 교회와 선교 현장에서 실제로 적용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주님께서 물으실 것이다. “내가 너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어떻게 사용했느냐? 너는 ‘문 앞의 나사로’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 그날에 부끄러움 없이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나사로’를 돌아봐야 한다. 그것이 누가복음 16장을 읽는 독자들이 붙들어야 할 메시지이며, 장재형목사가 누차 강조해 온 “복음의 실제적 적용”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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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 속에 피어난 복음 – 장재형목사

장재형목사

장재형목사가 사도행전 8장 1–5절을 중심으로 한 설교·강의를 토대로 본문이 말하고 있는 초대교회의 역사와 복음 전파, 그리고 그 정신을 현대 교회가 어떻게 이어받아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신학적·실천적 고찰을 담았다. 또한 장재형목사가 강조해온 ‘참된 복음’과 ‘역사를 꿰뚫는 하나님 나라’의 시각을 중심으로, 환란 속에서도 진전하는 복음의 능력과 교회의 새 시대적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초대교회의 핍박, 흩어짐, 그리고 복음의 확장

사도행전 8장 1–5절은 초대교회가 겪은 극심한 박해와 그로 인해 교회가 흩어지는 장면을 증언한다. 특히 사도행전 7장에서 돌에 맞아 순교한 스데반의 죽음 이후, 교회 공동체에 대한 대대적 탄압이 시작되었다. 스데반이 죽자마자 많은 성도들이 심한 두려움을 느꼈고, 예루살렘 교회를 대상으로 한 핍박이 가혹하게 일어났다. 이로 인해 “사도들 외에는 다 흩어졌다”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교회 공동체는 각 지역으로 흩어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사울(훗날 바울)이 교회를 잔멸하고자 각 집을 수색하며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는 일까지 벌어졌다(행 8:3). 당시 핍박을 받은 성도들은 마치 큰 홍수에 휩쓸린 자처럼,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도행전 8장은 이러한 ‘흩어짐’이 결코 복음의 후퇴나 실패를 의미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성도들이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도피하듯 몸을 숨겼어도, 그곳에서 그들은 “복음의 말씀을 전”하게 된다(행 8:4). 인간적으로 보면 ‘슬프고 겁먹은 영혼’들의 이동이었으나, 하나님의 시선에서 보면 이 사건은 복음의 지경을 확장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을 벗어나 사마리아에까지 이르는 복음 전파가 본격화되었고,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더욱 넓은 지역으로 뻗어나가게 되었다.

이 대목은 예수님의 지상명령(Great Commission)을 다시금 상기시키기도 한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며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는데(마 28:19–20),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하신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성장하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자신들이 본격적으로 땅끝까지 가야 한다는 분명한 사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정 기간 동안은 한곳에 머무르는 상태로 안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스데반의 순교와 박해로 말미암아 억지로라도 흩어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복음 전파의 지평이 예루살렘 너머로 확대되었다.

이 장면을 두고 교회사학자들은 ‘사탄의 역설적 실패’라고 부르기도 한다. 악한 세력이 교회를 탄압함으로써 복음을 막으려 했지만, 오히려 그 탄압이 복음을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두려움과 비극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오히려 구원의 역사를 진전시키는 열쇠로 작용한 것이다. 이것은 초대교회 시절뿐 아니라 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 빈번히 나타난 패턴이다. 교회가 고난당할수록 복음은 오히려 더 멀리 퍼져나갔고, 성령의 권능을 힘입은 성도들은 그 흩어진 장소에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했다.

이와 같은 역사적 패턴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해의 정도와 형태는 달라졌으나, 교회가 세상 속에서 겪는 어려움과 핍박은 여전히 존재한다. 동시에 교회 내부에도 왜곡된 사상이나 복음을 흐리는 이단적 흐름, 또는 편협한 교권주의와 물질적·인간적 욕심 등이 섞여 들어올 때가 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가현설(도케티즘, Docetism)이라든지 영지주의(Gnosticism) 같은 잘못된 사상들이 성도들을 현혹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우리가 구원에 이르려면 스스로 안에 있는 어떤 신적 파티클(particle)을 개발해 온전한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복음을 흔들어 놓았다. 이런 내부적 도전과 외부적 박해 속에서도, 초대교회는 결국 ‘바른 복음’을 지켜냈고, 오히려 온 세상으로 뻗어나가는 원동력을 발견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초대교회의 모습을 주목하면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환란을 겪을 수는 있어도, 진정한 복음 전파의 사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해 왔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영광 중에도 사역할 수 있지만, 고난 중에도 여전히 놀라운 방법으로 복음을 펼쳐가신다. 성령은 억지로 흩어지게 된 상황에서조차 각 사람의 마음에 함께하시고, 그 교회 공동체가 흩어진 자리에서 새로운 역사와 만나게 하신다. 이런 이유로 “핍박과 환란이 결코 복음 전파의 동력을 잃게 하지는 않는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선교 현장에서의 도전과 역경을 ‘새로운 기회’로 해석하고 수용하는 교회론을 제시한다.

실제로 사도행전 8장 4절,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라는 구절은 ‘흩어짐’이 ‘사라짐’이 아니라 ‘확장’이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사람의 눈에는 패배처럼 보일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 광범위한 이동과 재배치를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이 증거되도록 하셨다. 당시 사마리아 지역은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던 땅이었고, 사회·종교적으로 유대와 갈등을 빚어온 역사가 있었다. 그런데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했을 때, 그곳에서도 많은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주로 고백했다(행 8:5 이하). 이 사건은 지리적·문화적 경계를 넘어서는 복음의 능력을 증거한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로, 세상이 갑자기 바뀌고 예상하지 못했던 시련이 몰려올 때—이를테면 전 세계를 뒤흔든 코로나19 팬데믹 같은 환란의 시기—예배 형태나 교회의 활동이 크게 제한될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핍박’이든 ‘환란’이든 어떠한 형태로든 겪게 되는 이 어려움을 하나님의 광대하신 목적 속에서 바라볼 때, 그것은 결국 새로운 형태의 복음 전파와 교회 공동체 형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환란을 만나 산산이 흩어지는 상황에서도, 성령이 머무는 교회는 결코 무너질 수 없다”라는 확신을 자주 강조한다. 성령은 모아주시기도 하지만 흩어지게도 하시며, ‘보이는 교회(visible church)’와 ‘보이지 않는 교회(invisible church)’를 아우르신다. 현대 교회가 예배당 건물이나 제도적 틀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복음을 인터넷이나 미디어를 통해 전하며, 다양한 문화적·사회적 접촉점을 활용해서 ‘보이지 않는 교회’를 넓혀 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초대교회 당시 성령이 흩어진 자들과 함께하셔서, 그들이 가는 곳마다 새로 세워지는 교회를 탄생시켰던 원리와 맞닿아 있다.

사도행전 8장에서 확인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교회가 ‘환란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 있다는 점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박해가 임하지 않았더라면 편안함에 안주하며 예루살렘 교회에만 모여 있을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박해라는 극단적 상황을 통해 성도들을 세상 구석구석으로 보내신다. 이 점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기쁜 노래를 부르며 자발적으로 흩어져 나간다면 얼마나 더 좋겠는가”라고 자주 역설한다. 즉, 억지로 몰려서가 아니라, 복음의 시급성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열정에 사로잡혀 자발적으로 떠나는 ‘순종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1장 28–30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두 아들의 비유처럼, 말만 하고 가지 않는 아들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자가 되어야 교회는 한순간의 환란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환란 때에 어쩔 수 없이 몸을 피하듯 복음을 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이미 ‘언제 어디로든 보냄받아 갈 준비가 된’ 상태여야 한다는 메시지다. 바울 역시 훗날 로마 황제의 박해 아래서도 끊임없이 편지를 써 교회들을 돌보았고, 감옥에서조차 복음을 전하였다(빌 1:12–14). 초대교회의 이 같은 모습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복음 전파의 원형질이다.

또한, 교회가 문화적·지역적 특수성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세워져야 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 사마리아에 내려간 빌립의 사역은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전통 유대교 관습과는 다른 새로운 문화적 맥락에 복음을 심어 넣은 사례다. 이와 유사하게 바울은 갈라디아, 에베소, 고린도 등 서로 다른 도시·문화권에 교회를 세울 때, 거기에 맞는 접근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다.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 에베소서 4장 등에서도 교회의 다양성 속의 일치를 강조하고 있으며, 각 지역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기능하되, 그 모양과 구조가 획일적이지 않음이 나타난다.

장재형목사는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명언, “종교는 문화의 본질이고, 문화는 종교의 옷이다(As religion is the substance of culture, culture is the form of religion)”를 자주 인용하며, “복음이라는 본질은 결코 바뀌지 않지만, 그것을 담고 있는 문화의 옷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라고 해석한다. 지금처럼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에는 SNS, 스트리밍, 온라인 커뮤니티, 화상회의 등 다양한 매체가 ‘복음을 담는 옷’이 될 수 있다. 결코 복음 자체를 변개해선 안 되지만, 전파의 형태와 교회 공동체 조직 방식은 얼마든지 달리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초대교회가 사도행전 8장 이후 점차 유대·사마리아를 넘어 소아시아와 로마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의 특성을 반영해 복음을 전한 것처럼, 현대 교회도 새로운 미디어와 방식, 여러 문화 영역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현대 교회에 당면한 또 다른 도전은 ‘개인의 구원’과 ‘역사의 구원’을 함께 균형 잡아 바라보는 것이다.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큰 주제는 창조, 타락(죄), 구원,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사망이 없고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 다시 없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과정’을 최종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거대 담론으로서의 역사를 이해할 때, 개인이 구원받는 것뿐만 아니라, 이 땅의 역사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함께 꿈꾸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역사의식이 현대 교회에서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초대교회 제자들이 예수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물었을 때(행 1:6), 예수님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정하셨다”라고 답하셨으나, 동시에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라고 당부하셨다. 이 땅의 역사 속에 복음이 자라나고, 하나님의 나라는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소망 안에서, 교회는 끊임없이 다음 세대를 일으켜 세우고, 전 세계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단순히 예배당 안에서만 머무르거나 교세 확장만을 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메시지가 사도행전 8장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초대교회는 스데반의 순교와 함께 불어닥친 대규모의 박해로 인해 성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이 흩어짐이 오히려 복음 전파의 문을 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반대와 핍박을 통해서도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며, 성령의 권능은 흩어진 성도들의 입과 발, 그리고 삶을 통해 새로운 지역에 복음을 뿌리내리도록 하셨다. 교회는 억지로 밀려나서가 아니라, 자발적 순종과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기꺼이 ‘땅끝’을 향해 가야 한다. 이것이 사도행전 8장 1–5절이 보여주는 초대교회의 모습이며, 또한 장재형목사가 늘 강조해온 복음 전파의 정신이기도 하다.

2. 현대 교회의 도전, 새로운 복음 전파 방식

사도행전 8장을 통해 확인한 초대교회의 역동성과 성령의 역사는 오늘날 교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문제는 시대가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교회가 세워진 1세기 지중해 세계와 비교할 때, 현재 인류는 기술, 문화, 경제, 정치, 사회 모든 면에서 엄청난 변화를 경험해 왔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많은 교회가 전통적인 예배 형태와 모임 방식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빠르게 온라인 예배나 비대면 모임을 시도해야 했다. 어떤 지역에서는 모이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신앙을 잃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동시에, ‘대면 예배’에 대한 지나친 고집으로 사회적 비판을 받기도 했다. 교회가 과연 이런 급변하는 환경에서 어떻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이어갈 것인지가 주요 과제로 떠올랐다.

장재형목사는 오랜 기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선교와 목회 활동을 해오면서, “교회가 건물을 벗어나 사람들의 실제 생활 영역 속으로, 그리고 미디어의 장(場) 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거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름다운 발’을 가지고 먼 나라를 직접 찾아가야만 했다면(롬 10:15), 현대에는 ‘미디어’가 발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과 SNS, 모바일 기기가 발달함에 따라, 교회는 직접 사람이 오지 않아도 복음을 전달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를 얻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메시지를 어떻게 전할 것인가’이며, 그 메시지의 핵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라는 불변의 진리여야 한다.

실제 장재형목사는 “Moving Forward”라는 슬로건처럼, 교회가 후퇴하거나 정체되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핍박이 닥치면 핍박 속에서, 환란이 오면 환란 속에서, 평안한 시기가 오면 평안함 속에서—어떤 상황에서도 교회는 절대 복음 전파의 엔진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초대교회처럼 ‘흩어지는 교회’가 되면 약화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 흩어짐이 ‘네트워크화’된 재배치로 작용할 수도 있다. 현 시대의 교회는 SNS나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흩어져 있으면서도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예루살렘 교회가 스데반의 순교 이후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갔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이 ‘새로운 교회의 형태’는 단지 모임을 온라인으로 바꾸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교회 운영, 제자훈련, 전도·선교 등의 모든 측면에서 디지털 환경을 교회 본연의 사명과 창의적으로 결합해야 한다는 의미다. 과거 초대교회가 회당과 성전, 그리고 가정 교회라는 다양한 형태를 오가며 사람들을 가르쳤던 것처럼, 현대 교회도 예배당, 온라인, 가정, 지역 커뮤니티 센터 등 다양한 공간을 활용해 복음을 심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헌금, 재정 운용, 인력 양성, 성찬과 세례 같은 성례전의 진행 등, 전통적 교회가 익숙하게 유지해 온 요소들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적용할 것인지는 상당히 신학적이고도 실천적인 과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 본질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강조한다. 교회의 본질, 곧 “그리스도의 몸이자 성령의 전이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는 공동체”라는 사실만 분명히 붙들고 있다면, 옷과 같은 외형적 문화 형식이 바뀌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본질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성령의 내주, 하나님의 나라 완성에 대한 소망 등 기독교 진리의 핵심 교리는 시대를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다.
  2. 형식은 변할 수 있다.
    예배당 중심 예배에서 온라인 예배로 확장되거나, 주일 한 번 모이는 형태에서 주중 소그룹 혹은 지역 공동체 활동으로 늘어나거나, 교회 재정 운영 방식이 바뀔 수 있다. 이것은 본질과 충돌하지 않는 한 모두 ‘문화의 옷’에 해당한다.
  3.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
    핍박이 오든 환란이 오든, 혹은 교회가 비교적 평온하고 사회적 신뢰를 받고 있든,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성령은 때로는 흩어지게도 하시고, 때로는 한데 모이게도 하시며, “어떻게, 어디서, 누구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알려 주신다. 빌립이 사마리아로 인도받아 복음을 전했고(행 8:5), 또한 이디오피아 내시의 수레 옆으로 가서 말씀을 가르친 것처럼(행 8:26–39), 현대 교회도 성령의 인도 아래 움직여야 한다.
  4. 새 시대에 맞는 교육과 제자 양성이 필수적이다.
    초대교회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지만, 회당에서 말씀을 교육했고, 가정 교회나 작은 모임에서도 끊임없이 가르쳤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미 자녀를 교육하는 전통이 강했기에, 회당 교육이 효과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다. 현대 교회도 시대의 변화에 맞는 교육 플랫폼, 청소년·청년 사역 모델, 온라인 성경 공부, 미디어 활용 등을 개발해야 한다. 이것이 없이는 교회가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다음 세대에게 복음을 전수할 수 없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원칙하에, “디자이너와 IT worker를 귀하게 여기라”고 강조한다. 복음 전파의 ‘아름다운 발’이 이제는 IT 인프라와 디지털 콘텐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이 ‘새로운 발’을 잘 활용하려면, 이를 이끌 인재가 필요하고, 그러한 인재가 실력을 발휘하여 디지털 사역을 활성화해야 한다. 크리스천 디자이너, 영상 편집자, IT 전문가, 온라인 마케터 등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재능을 봉사와 사역으로 연결한다면, 전 세계 어디든 즉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창구가 열릴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그는 “교회가 하나의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초대교회는 교인들이 공동체적으로 재산을 나누고(행 2:44–45), 사도들의 가르침을 함께 배우며(행 2:42), 서로 돌보고 교제했다. 오늘날 교회도 이러한 ‘연결’과 ‘돌봄’ 기능을 디지털 환경에서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신자들이 말씀을 배우고, 서로 소식을 나누며, 지역사회의 어려운 이들을 돕고, 개인 상담과 기도 요청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렇게 교회가 플랫폼화되면, 물리적 공간의 제약이나 거리의 장벽을 뛰어넘어 훨씬 더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동시에 성도 간의 교제를 풍성하게 할 수 있다.

나아가,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에게 주신 구원 역사의 흐름 안에 있다”는 ‘역사 신학적’ 시각을 늘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사도행전 1장 8절에 언급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과도 맞닿아 있다. 단지 지역 교회만을 성장시키는 것을 넘어서, 지구상의 모든 민족과 나라가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교회가 끊임없이 준비하고 파송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교회가 여러 나라에 맞는 ‘현지화된 형태’로 세워져야 한다. 음식 문화, 의복, 언어, 인프라 환경 등은 제각각 다르기에, 어느 지역 교회든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선 현장의 상황에 맞게 적응해야 한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소아시아, 로마 등 각기 다른 문화권에 맞춰 교회 모델을 달리했음을 상기시키며,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와 유대인의 정체성을 함께 활용해 복음을 폭넓게 전했던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오늘날 인터넷은 이러한 ‘다양한 문화권’을 한꺼번에 연결할 수 있는 획기적 통로다. 이를 통해 선교가 훨씬 더 빠르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예컨대,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 마을에 직접 선교사가 들어가기 이전에, 온라인 콘텐츠나 통역 영상을 통해 먼저 복음을 소개할 수도 있다. 또는 현지의 소규모 공동체가 온라인으로 훈련을 받고, 함께 기도와 예배를 드릴 수도 있다. 이를 체계적으로 운영하려면 교회가 ‘디지털 선교 센터’나 ‘온라인 미션 스쿨’ 같은 조직을 마련하고, 교역자나 선교사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새로운 시대로 가는 길을 예비하는 교회”라고 칭하며, “곧 새벽이 오리라”라는 확신 속에 교회가 선제적으로 움직이길 촉구한다.

그는 또한 “마지막 때에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 과정”에 적극 동참해야 할 필요성을 부단히 제기한다. 초대교회에서부터 이뤄져 온 복음 확장이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며, 다양한 장애와 영적 전투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교회를 통해 계속 일하시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오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해 복음이 먼저 전파되어야 한다”(막 13:10)는 말씀대로 역사적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결국, 초대교회가 가졌던 영적 DNA—곧 환란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복음 확장의 발판으로 삼았던 불굴의 믿음, 문화와 지역 경계를 뛰어넘어 기꺼이 흩어져 간 선교 정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순종—이 현대 교회에도 필요하다는 결론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DNA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미디어와 IT 기술, 온라인 네트워크, 그리고 시대적 문화 트렌드를 적극 활용하여 전 세계로 나아가는 교회를 형성하길 촉구한다.

핵심은 ‘바른 복음’과 ‘참된 교회론’을 견지하는 것이다. 아무리 최신 기술과 플랫폼을 사용한다 해도, 복음 자체가 흐려지거나 진리가 왜곡되면 교회의 생명력은 사라진다. 반대로, 복음의 핵심이 견고히 서 있고 교회의 본질을 지키는 가운데, 시대 변화에 능숙하게 대처하며 다양한 사역을 시도한다면, 초대교회의 “흩어지는 중에도 전진하는 교회”가 오늘날에도 힘차게 재현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추수의 때’를 맞이하고 있다고 자주 언급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영적 갈급함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찾아 방황하는 시대이기에, 교회가 정확하고도 따뜻한 복음을 제시한다면 많은 영혼이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다. 사도행전 8장 8절 이하에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많은 사람을 고치고 복음을 전했을 때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고 나와 있다. 이처럼 기쁨이 없는 세상 가운데 기쁨이 전해지고, 절망하는 곳에 소망이 전해지는 것이 복음 사역의 핵심이자 결실이다.

한편, 교회가 이렇게 ‘흩어지는 교회’이자 ‘네트워크 교회’로 변모하는 과정에서는 내부적으로 여러 가지 도전이 뒤따른다. 기존 제도권 교회 내부에서 이러한 변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호의적이지 않을 수 있고, 물리적 예배당과 공동체성을 중시하는 전통 교인들과 갈등이 발생할 수도 있다. 성찬이나 세례를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문제, 직분의 위임과 목회적 치리가 어떻게 이뤄질지 등에 대한 신학적 논의도 아직 충분히 정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재형목사는 “복음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이 모든 논의를 거치면서도 결국 전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예루살렘 교회와 사마리아, 더 나아가 안디옥 교회가 함께 겪었던 시행착오의 현대판”이라고 부른다. 유대인 중심의 초대교회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맞닥뜨린 문화적, 신학적, 실천적 갈등(행 10장, 갈 2장 등)을 생각해 보면, 교회 역사는 언제나 자기 갱신과 확장을 통해 성장해 왔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까지 ‘완성된 형태’로 머무는 법이 없으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개혁하고 복음의 지평을 넓혀가야 한다.

결론적으로, 사도행전 8장 1–5절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흩어짐과 복음 확장’은, 현대 교회가 갈 길을 조명하는 강력한 등불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는 늘 성령의 능력이 함께하며,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주도하신다. 교회가 성령께 순종해 모일 때는 모이고, 흩어질 때는 흩어져야 한다. 이 원리를 현대에 적용할 때, ‘보이지 않는(invisible) 교회’와 ‘보이는(visible) 교회’가 동시에 작동하는 시대적 교회론이 가능해진다. 또, 개인 구원만이 아닌 역사의 구원을 꿈꾸는 거시적 안목 속에서, 이 세상의 흐름을 성경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의 섭리에 맞추어 모든 열방으로 나아가는 ‘미디어 시대의 선교’가 활짝 열릴 수 있다.

장재형목사가 제시하는 방향은 결국 “상황에 매이지 않되, 상황을 역이용해 복음 확장을 이루라”는 메시지에 요약된다. 이는 초대교회가 박해를 ‘전진의 계기’로 삼은 것처럼, 현대 교회도 역병이나 사회적 제약, 문화적 편견과 불신 속에서도 여전히 ‘Moving Forward’ 해야 한다는 의미다. 성령은 지금도 살아계시며, 교회를 통해 역사하시고,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모든 민족과 열방에 나타내신다. 교회는 그 부름에 응답하여—흩어지든 모이든,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끊임없이 복음을 말하고 나누어야 한다.

사도행전 8장에서 스데반의 죽음에 대한 큰 울음 뒤에도 빌립이 사마리아로 내려가 복음을 선포하며 기쁨을 전했던 것처럼, 현대 교회도 오히려 어려운 시대 한복판에서 기쁨과 소망의 메시지를 증거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핍박과 환란이 클수록, 성령의 임재와 권능은 더욱 강하게 역사할 수 있음을 기억하자. 그렇기에 우리가 이 땅에서 순례자로 살면서도 담대해질 수 있고, 어떤 모양으로든 교회를 이어가며 복음을 확장해 갈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배후에는, 초대교회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며, 그 하나님께서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모든 복음의 일꾼에게 “가라, 그리고 전하라”라고 명령하신다. 핍박이나 환란이 아니라, 사랑과 순종과 기쁨의 동력으로 자발적으로 나아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한국 교회, 세계 교회가 사도행전적 부흥과 역동성을 다시금 회복하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사명을 다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핵심은 “초대교회 역사를 통해 본 복음의 확장과 현대 교회가 마주한 변화, 그리고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바른 복음과 새로운 교회 패러다임”이다. 초대교회는 박해 속에서도 흩어짐이 복음 확장의 계기가 되었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어디에서나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다. 현대 교회는 다른 차원의 도전에 직면했지만, 여전히 같은 성령과 동일한 복음을 붙들고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부각하면서, “교회가 이제 시대에 맞춰 유연하고도 강력하게 확장해 가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사도행전 8장을 자세히 살피며 깨닫게 되는 진리이며, 믿음 공동체로서 실천해야 할 분명한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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