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 성경 묵상: 보이지 않는 섭리를 따르는 믿음과 동역 (Olivet University)

이탈리아 로마의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깊은 곳에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쏟아지는 강렬한 빛을 화폭에 가둔 카라바조의 명화가 하나 걸려 있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성 바울로의 회심’이라는 이 작품은 말에서 떨어져 눈을 감은 사울과, 그 내면에서 일어나는 우주적 격변을 알지 못한 채 평범하게 서 있는 주변 인물을 극단적인 명암으로 대비시킨다. 이 캔버스 안에는 하늘의 거대한 사건이 한 인간의 내면을 어떻게 전복시키는지에 대한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바로 이 침묵의 이면에 감춰진 거대한 움직임, 곧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쉼 없이 박동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추적하며 시작된다. 성경을 단순히 죽은 활자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에서 호흡하는 영적 현존으로 읽어낼 때, 우리는 비로소 종교적 표면을 지나 은혜의 심연으로 들어가게 된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한복음의 이 선언은 단순한 부지런함의 권면이 아니라, 인간의 일상 아래에서 흐르는 영원한 생명의 궤적을 보여주는 신학적 나침반이다. 말씀의 흐름은 우리를 바쁘게 돌아가는 삶의 표면에서 잠시 멈춰 세우고, 차원을 넘는 배후의 세계로 시선을 돌리도록 이끈다. 우리가 계획하고 대화하며 성취와 실패를 번갈아 맛보는 모든 일상의 시간 속에서, 실은 하나님께서 먼저 움직이시고 그 거룩한 파동 위에 우리의 걸음이 정렬된다는 것이다. 이 깊은 통찰은 신앙을 맹목적인 도덕적 결단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일하심에 기꺼이 합류하는 동역의 기쁨으로 승화시킨다. 사역이란 내 힘으로 하나님을 돕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하고 계신 그분의 손길을 알아채고 그 흐름에 나의 삶을 포개어 넣는 일이다.

빛이 어둠을 가를 때, 비로소 열리는 은혜의 배후

사도행전 아홉 장에 등장하는 사울의 이야기는 이 배후의 세계가 어떻게 인간의 닫힌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지를 가장 강렬하게 증언한다. 사울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갇혀 교회를 향한 폭력과 결박을 정당화하던 굳건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메섹을 향하던 그의 살기 등등한 발걸음은 벼락처럼 쏟아지는 하늘의 빛 앞에서 철저히 멈춰 선다. 주님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음성은 그의 오만한 이성을 단숨에 해체하고 존재의 밑바닥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부르심이었다. 이 설교가 비추는 자리는 바로 이 압도적인 은총의 순간이다. 회심은 결코 인간 스스로의 뼈를 깎는 수양이나 지적 동의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계산과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교회의 원수를 먼저 찾아가 당신의 빛으로 덮어버리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 사건이 바로 복음이다.

빛을 잃고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사울의 암흑은 단순한 육체적 충격이나 고통의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전의 낡은 확신이 철저히 무너지고, 새로운 차원의 세계가 그 안에서 태동하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거룩한 진통이었다.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파올리나 경당의 벽면에 거대한 규모로 그려낸 회심의 서사처럼, 사울의 엎드러짐은 개인의 윤리적 개선을 넘어 역사 전체의 방향을 꺾어버리는 계시의 발현이며 존재론적 전환이다. 내가 내 삶의 궤도를 주도하겠다는 헛된 의지가 꺾이는 바로 그 순간, 인생의 진정한 문이 열린다. 복음은 우리를 먼저 철저히 무너뜨린 후, 하늘의 생명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는 역설적인 사랑이다.

부르심의 궤도를 바꾸는 섭리와 순종의 리듬

하나님의 구원 드라마는 한 사람의 극적인 변화만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침묵으로 준비된 또 다른 순종을 통해 역사 속으로 확장된다. 사울이 암흑 속에서 진지한 기도로 나아가고 있을 때, 주님은 무대의 다른 편에서 아나니아라는 이름 없는 제자를 부르신다. 아나니아는 위대한 업적으로 기억되는 인물이 아니었으나, 주님의 부름에 즉각적으로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응답할 수 있는 깊은 친밀함의 소유자였다. 이 묵상적 본문은 사역이란 결국 거창한 실적을 증명하는 노동이 아니라, 주님의 세밀한 음성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영적 네비게이션임을 일깨운다. 하나님은 사람의 이름과 그가 머무는 거리, 그리고 그 영혼의 고단한 상태까지 정확히 감찰하시며, 칼빈이 말한 섭리와 예정의 신비 속에서 두 사람의 궤도를 완벽하게 연결하신다.

물론 믿음의 사람은 기계적으로 순종하는 로봇이 아니기에, 아나니아 역시 교회의 핍박자였던 사울을 향해 두려움 섞인 항변을 토해낸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억압하지 않으시고, “이 사람은 택한 나의 그릇이라”며 더 깊은 차원의 계획을 설득하신다. 부름받은 자의 영광 뒤에는 언제나 고난의 짐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음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아나니아가 두려움을 넘어 사울에게 안수하며 “형제 사울아”라고 부를 때, 세상의 낡은 상식은 무너지고 하늘의 샬롬이 역사 속으로 침투한다. 이처럼 장재형 목사의 메시지는 우리 각자가 일상에서 감당하는 작은 순종이 어떻게 거대한 하나님 나라의 큰 운동과 연결되는지를 묵직하게 조명한다. 동역은 거창한 직함이 아니라 그저 주님의 흐름에 몸을 내어드리는 관계적 행위이며, 그때 비로소 우리는 “주께서 하신다”는 진정한 능력의 고백을 터뜨리게 된다.

경계가 무너진 자리에 찾아오는 복음의 지평

사도행전 열 장으로 넘어가면, 인간의 굳어진 경계를 허무시는 성령의 역사가 한층 더 선명하게 펼쳐진다.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는 이방인이자 제국의 칼을 든 자였으나, 성경은 그를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제하며 항상 기도하는 자로 묘사한다. 이는 복음이 결코 특정 혈통이나 율법의 울타리 안에 갇힐 수 없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방증이다. 천사가 고넬료에게 나타나 그의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었음을 알리는 장면은, 우리의 구체적인 기도가 보좌를 움직이는 실제적인 사건임을 증명한다. 전도란 정교한 논리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기술이 아니라, 이처럼 하나님께서 미리 가꾸어 두신 영혼의 갈망을 존중하며 그 앞에 마주 서는 떨림의 과정이다. 교회 밖의 낯선 경계에 서 있었지만 마음을 열어둔 그 사람을, 하나님은 섭리의 네비게이션을 통해 가장 먼저 찾아가신다.

같은 시간, 베드로 역시 욥바의 지붕 위에서 정시 기도를 드리다 하늘이 열리는 황홀경을 경험한다. 속된 짐승을 잡아먹으라는 지시 앞에 율법의 테두리를 생명처럼 지키려던 베드로의 저항은,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세 번의 엄위한 선언 앞에서 산산조각이 난다. 도메니코 페티가 그려낸 어둠 속 베드로의 경건한 떨림처럼, 오래된 종교적 정체성이 해체되고 더 넓은 구원의 지평으로 이식되는 이 순간은 지독하게 고통스러우면서도 눈부신 축복이다. 베드로의 내적 붕괴가 끝남과 동시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문 밖에서 그를 찾는 극적인 타이밍은, 한 사람의 경건과 한 사람의 순종, 그리고 한 사람의 파송이 하늘의 지시와 맞물리는 동역의 완벽한 리듬을 보여준다.

거룩한 일상을 향한 고백,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섰을 때, 제국의 권력을 쥔 백부장은 갈릴리의 늙은 어부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를 황급히 일으켜 세우며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고 응답한다. 인간의 세속적 서열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는 거룩한 질서가 세워지는 순간이다. 고넬료는 감격에 겨워 “이제 우리는 주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장재형 목사 설교의 결론은 바로 이 엄숙하고도 아름다운 자리를 향해 치닫는다. 우리의 모임, 우리의 만남, 우리의 작은 수고는 결코 사람 앞에서 성과를 증명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영원 앞에서 우리의 존재 전체를 드리는 거룩한 예배이며 순종의 여정이다.

신앙은 결국 삶의 아주 작은 틈새에서도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는 두려움과 매혹을 동시에 품고 살아가는 일이다. 정시 기도는 단순히 시계를 맞추는 율법적 강박이 아니라, 내 영혼의 안테나를 세상의 소음에서 거둬들여 하늘의 주파수로 다시 맞추는 생명의 호흡이다. 예배당에 꽂을 꽃 한 송이를 고르는 마음이나 처음 것을 구별하여 드리려는 손끝의 작은 정성에서부터 우리의 경외심은 증명된다. 바쁜 업무와 뒤엉킨 관계 속에서도 의도적으로 멈추어 하늘을 우러러볼 때, 흩어지고 깨졌던 일상은 비로소 하나의 의미 있는 언약의 서사로 아름답게 꿰어진다. 우리가 수많은 우연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아버지의 손길을 확신할 때, 우리의 걸음은 더 이상 외로운 방황이 아니라 거룩한 동행이 된다. 오늘 당신이 선명하게 마주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과 분주한 일들 속에서, 당신의 내면은 과연 누구의 지시를 기다리며 서 있는가. 우리가 무릎을 꿇고 헛된 고집을 꺾는 그 고요하고 정직한 자리에서, 닫혀 있던 하늘의 문은 다시 소리 없이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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