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1. 영생을 결정하는 지상의 삶

누가복음 16장에 기록된 두 개의 비유 중 앞부분에 등장하는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와, 뒷부분에 이어지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그 연장선상의 가르침을 깊이 들여다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을 사는 우리에게 삶의 방향과 태도를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삶의 중요성”과 동시에 “두 세계(이생과 저생)의 존재”를 진지하게 묵상하게 된다. 장재형목사 또한 여러 설교를 통해, 이 땅에서 살아가며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지혜롭게 행해야 하고, 가난한 자와 연약한 자에게 관용과 사랑을 베푸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임을 강조해 왔다.

먼저 앞부분의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를 간단히 살펴보면(누가복음 16:1-9), 주인은 청지기가 재물을 낭비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불러놓는다. 청지기는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낮춰 주며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푼다. 겉으로 보면 부정한 방법으로 경제적 손익을 조정한 것이 분명 옳지 않다. 그러나 주인은 청지기의 행동을 “지혜롭다”고 칭찬한다. 비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예화를 통하여 강조하시는 핵심 중 하나는 “이 땅에서 맡겨진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이다. 곧 물질 자체의 소유 여부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들을 다른 이들과 나누며 베푸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라는 점을 보여주신다. 성경은 우리가 가진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그저 청지기(관리자)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청지기가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유한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혜롭게 활용하는 모습은, 우리도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기회’와 ‘시간’과 ‘재물’을 선용하여,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교훈으로 이어진다.

이 비유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등장한다(누가복음 16:19-31). 이는 서로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별개의 예화가 아니라, “가진 자로서, 혹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떤 태도로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연장선상의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다.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즐겼다. 반면 나사로라는 거지는 온 몸에 헌데가 있고,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겨우 배를 채우려는 극도의 빈곤에 처해 있었다. 강아지들이 헌데를 핥을 정도로 비참한 상황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지상에서 살아가다가, 둘 다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여기서부터 놀라운 반전이 시작된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천국 같은 의미)으로 들어갔고, 부자는 음부(지옥)로 들어가 고통을 당한다.

이 비유는 “두 세계의 존재” 즉, 이생과 저생(죽음 이후의 세계)이 분명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사람들이 영원한 관점으로 현재의 삶을 바라보도록 가르치신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경험하는 지상의 삶이 전부가 아니며, 죽음 이후에 이어지는 영원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강조하는 핵심 가르침으로서,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저 세계에서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성경은 누누이 말한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하였고, 전도서 12장에서도 “육은 흙으로 돌아가되 영은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일깨운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설교에서, “우리가 눈에 보이는 현실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영원한 것들을 놓치기 쉽다”고 강조하며, “믿는 자들은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야 하고, 이 땅에서의 삶을 통해 영원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경종이기도 하다. 부자는 지상에서 호화롭고 풍족한 삶을 살았지만, 막상 죽고 난 이후에는 음부에서 고통에 빠진다. 질문이 생긴다. “왜 부자는 지옥에 갔는가?”, “이 비유가 말하는 바는 ‘가난해야만 천국 간다’는 뜻인가?” 물론 성경은 가난한 사람이 반드시 천국에 간다거나, 부자라고 무조건 지옥에 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욥기의 욥은 믿음이 좋았을 뿐 아니라 큰 재물을 가졌고, 아브라함 역시 부유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지옥에 간 것은 아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물질 자체”가 아니라, 그 물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마음,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는지 여부”에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누가복음 16장에서는 ‘부자가 자기 집 문 앞에 있었던 극빈자 나사로를 전혀 돌보지 않았다’는 현실이 강조된다. 거리는 매우 가깝다. 나사로는 부자의 대문 앞에까지 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는 그를 무시하고,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잔치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 부자가 표현하는 모습이 곧,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풍족히 누리면서도, 그 복을 나누려 하지 않는‘영적 자기중심성’을 가진 신자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때 나사로라는 ‘거지’는 상징적으로, 믿음에 굶주리고 말씀에 목말라 하는 자들, 혹은 물질적/영적으로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들을 나타낸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신자들이 부유함(물질적 풍족이든, 말씀의 풍족이든)을 누리게 되었을 때, 그 다음 단계로 반드시 ‘나눔과 섬김’이 따라야 한다고 자주 가르친다. 나사로를 외면한 부자의 비극은, 결국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복과 은사가 오로지 ‘자기 잔치’로만 소비될 때, 최후 심판 앞에서 얼마나 허무하고 두려운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나사로는 죽은 뒤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다.” 이는 유대인들이 “최고로 복된 상태” 또는 “천국”을 묘사할 때 즐겨 쓰는 표현이다. 반면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아브라함과 나사로를 본다. 그는 이렇게 부탁한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제발 나사로를 보내어 이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달라. 그리고 제 형제들에게도 나사로를 보내어 이곳에 오지 않도록 회개하게 해달라.” 그러나 아브라함은 단호히 말한다. “이미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어다.” 구약성경 전체, 곧 모세오경과 예언서들에 이미 메시아와 영원한 세계, 그리고 의인의 길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들이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설령 죽은 자가 살아나서 말을 전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라는 결론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실제로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를 죽음에서 살리셨을 때, 이것을 목격한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고 따르기도 했으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를 더 강화했다. 이는 “기적이나 초자연적 사건이 곧바로 인간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믿으려는 사람들은 믿음을 얻게 되지만, 이미 마음이 굳어버린 사람들은 기적에도 불구하고 더욱 강퍅해진다. 예수님은 “진정한 회심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죄를 깨닫고, 돌이키는 데서 온다”고 가르치신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에게는 이미 충분한 ‘말씀의 증거’가 주어져 있으며, 이를 듣고도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더 놀라운 표적과 기사가 발생해도 돌이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마지막 때에 임할 심판과 동시에 ‘이미 주어진 말씀의 빛’을 떠올릴 수 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복음 14:6)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향해 “내가 처소를 예비하러 가느니, 곧 너희를 위하여 천국의 길을 열기 위함이다. 그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 하신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 땅의 삶에만 몰두하여, 영원을 소홀히 하기가 쉽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단지 “부자가 지옥에, 거지가 천국에 갔다”는 수준의 단순 도식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태도로 지상의 삶을 보내며,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공의와 자비’를 얼마나 실천하는가에 따라 마지막 운명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엄중히 말해준다.

특히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 곧 목회자, 선교사, 신학자, 평신도 지도자 등은 모두 ‘부자’”라는 점을 자주 지적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물질적 풍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령 우리가 성경말씀, 신학적 자원, 신앙적 자유, 예배의 환경, 풍성한 설교와 교제 등 영적 자원을 많이 가졌다면, 그것은 곧 영적으로 부유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사로가 바로 눈앞에 있지만 외면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말씀과 은혜를 혼자서 누리기만 한다면, 그 결과는 부자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와 말씀, 지식과 교리를 제대로 분배하고 나누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은 오늘날의 교회와 각 개인에게 여전히 유효한 경종이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다면, 눈앞에 보이는 ‘나사로’를 외면할 수 없다. 나사로가 단지 밥을 못 먹고 있는 것인지, 혹은 영적으로 굶주려 있는 것인지, 혹은 고통받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인지, 사람마다 형편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주변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장)라고 가르치셨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도, “줄이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든 자에게 무엇을 하였느냐”가 심판의 중요한 기준 중 하나라고 말씀하신다. 이를 통해 볼 때, 지금 이 순간에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아니면 나 역시 잔치상만 바라보는 사람인지를 진지하게 점검해야 할 것이다.

이 비유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지점은 ‘죽은 뒤에는 운명을 뒤바꿀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말씀(마태복음 18장)이 바로 이를 가리킨다. 아브라함은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갈 수도, 너희가 여기로 올 수도 없다”고 말한다. 즉, 이 땅에서 회개하고 돌이키지 못하면, 저 땅에 가서는 이미 늦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구원받으면 되지 않느냐”는 안일한 태도는, 성경적 가르침 앞에서 상당히 위험한 생각일 수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간이 순간을 놓친다면 영원한 결정을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복음 전파’에 힘써야 한다. 이는 진정 사랑의 행위이다. 영원한 사후 세계와 하나님의 심판을 믿기에, 믿지 않는 자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동시에 믿는 이들끼리도 서로를 격려하며, 이제 막 믿기 시작한 형제자매들에게 말씀을 나누고, 그들이 영적으로 세워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가르치고 도와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결코 자기 만족에 그치지 말고, 복음서와 선교서를 통해 확인되는 ‘가르치고(제자 삼고), 선교하는 사명’을 적극 실천해야 한다고 누차 강조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도구 중 하나가 바로 ‘책(기독교 서적)의 나눔 사역’이다. 풍성한 교회와 신학교, 또는 신앙 공동체가 있는 지역에서 넘쳐나는 자료들을, 아직 말씀과 양서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곳으로 보내어 영적 양식을 공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 시대의 교회가 실천해야 할 ‘현대판 나사로 돕기’의 한 형태로도 볼 수 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주는 첫 번째 큰 교훈은, “우리는 모두 나그네이며, 죽음 이후의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 복음서의 예수님 말씀, 사도들의 전언은 일관되게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므로, 현세에서의 삶을 통해 영원을 준비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얼마나 교만해지고, 안일해지기 쉬운지를 되돌아보면, 이 메시지가 우리의 신앙에 얼마나 절실한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 교훈은, “우리에게 있는 것들을 나누며 살아야 한다”이다. 재물만이 아니다. 말씀, 은사, 지식, 재능 등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풍성함이 있다면, 그 복을 혼자서 소모하거나 자기 교회, 자기 모임 안에서만 소비하지 말고, 문 밖의 나사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곧 ‘복음적 삶의 증거’이며, “천국의 세계관을 가진 이가 필연적으로 드러내야 할 모습”이라고 역설한다.

더 나아가, 이 비유에서 부자는 “내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야고보서 3장에서 “혀는 곧 불이며,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는 지옥 불에서 난 것”이라 일컬을 만큼, 혀는 죄를 범하는 핵심적 도구가 된다. 부자의 “혀”는 지상에서 어떠했을까? 나사로를 멸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며, 자신의 즐거움과 자랑을 일삼던 모습으로 묘사되지는 않았을까? 정작 나사로의 존재를 무시하고 방치했던 부자는, 죽음 이후에야 “혀가 말라버리는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것이 단순한 상징이든 실제든, 중요한 것은 우리 삶에서 ‘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혀로 누군가를 살릴 수도 있고, 혀로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 고통받는 이에게 위로를 건네고 그를 도울 수도 있지만, 정죄와 비난, 욕설과 거짓말로 상처를 줄 수도 있다. 부자의 혀는 지상에서 나사로에게 사랑을 베푸는 말, 혹은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지시를 전혀 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것을 곱씹으며, “과연 지금 내 혀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를 스스로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

한편,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공평하시다’는 진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부자가 이 땅에서 좋은 것을 받았다면,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죽음 이후에는 반대가 되어 나사로가 위로를 받고 부자가 괴로움을 받는다(누가복음 16:25). 이것을 단순히 ‘공평’이라는 잣대로만 해석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지만, 분명 하나님은 “세상의 논리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심을 암시한다. 인간의 시선으로는 지금 당장의 현실이 불공평해 보일 수 있어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에 옳은 판단을 내리신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 12:21)는 말씀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여러 부조리와 모순을 마주하더라도 낙심치 않는 이유는,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온전히 보상하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믿기에, 나사로처럼 고난을 받는 이들도 마지막을 소망하며 견딜 수 있고, 부자처럼 이 땅에서 풍족한 이들도 자만하지 않고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며 베풀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부자가 부탁한 내용—“나사로를 보내어 형제들이 회개하게 해달라”—는 겉보기엔 형제들을 배려하는듯한 행동이다. 그러나 이미 주어진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아무리 극적인 체험(죽은 자가 살아나서 전해주는 메시지)이 추가로 주어져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 아브라함의 대답이다. 이는 기적이 아니라 말씀을 믿는 신앙이 본질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기적이나 표적만 쫓아다니다가, 말씀이 실제로 선포되고 가르쳐지는 자리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표적에서 믿음’이 아니라, ‘말씀에서 비롯되는 믿음’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여러 곳에서, 표적을 보이실 때마다 “너희가 표적을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는다”(요한복음 4:48)고 한탄하셨고, “말씀을 믿는 자가 복되다”고 선언하셨다(요한복음 20:29). 장재형목사 또한 기적 중심의 신앙이 아닌, 말씀 중심의 바른 신앙을 가질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표적은 일시적이고 보조적인 것이지만, 말씀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말씀 안에 기초한 신앙은 폭풍이 불고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죽은 자에게서 살아온 사람”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손에 주어진 “성경”을 펼쳐서, 그 안에 담긴 복음의 메시지를 똑바로 듣고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이 땅에서 저 땅(천국)으로 옮겨가는 유일한 길이며, “청지기의 지혜”를 실천하는 방법이다. 이 땅에서 매여 있던 것들, 예를 들어 물질적 집착, 이기적 야망, 남을 판단하고 미워하는 마음 등을 풀어내고, 대신 사랑과 나눔, 관용과 겸손을 매어두는 것이 곧 천국의 가치관을 소유한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삶을 살 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 땅에서 부분적으로 임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사람은, 죽음 이후 영원한 나라에서도 풍성한 상급을 누리리라는 것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전하는 핵심 메시지다.

이제 우리는 이 가르침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을 넘어, 실제 삶에서 적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허락하신 물질적 풍요가 있다면, 주변의 나사로에게 나누어줄 마음이 있는지 살펴보자. 내가 영적으로 부유하다고 생각한다면, 혹은 신학적 지식이 많다고 생각한다면, 그 지식으로 누구를 가르치고 일으키고 있는가를 돌아보자. 만일 내가 나사로처럼 헐벗고 굶주려 있다면, 하나님 앞에 무조건 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왜 이 길을 지나게 하시는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 하는지’를 살펴볼 필요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이 땅에서 낮아지고 가난한 자로 머무르면서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바라보는 이에게 ‘하늘의 복’이 있다는 희망을 전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평하시며, 마지막 심판의 날에 진실로 의를 따라 갚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의 설교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각 사람의 수고를 절대 잊지 않으신다”고 반복적으로 가르쳐왔다. “차가운 물 한 잔을 대접한 것까지도 주님께서 기억하시고 갚아주시는 분이다. 하물며 우리가 영혼을 살리고자 복음으로 돕고, 말씀으로 섬기고, 물질로 함께하는 수고를 주님이 모르실 리 없다. 이 땅에서 보상을 전부 받지 못할지라도, 저 하늘에서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이 주요 강조점이다. 이런 확신이 있기에, 우리는 구제와 선교, 교육 사역 등 다양한 형태로 이웃을 돌보는 일에 힘쓸 수 있다. “북 스토어 사역”이라는 구체적인 예에서도 보듯, 한 권의 기독교 서적이, 영적으로 목마른 누군가에겐 구원의 단서가 될 수 있다. 이미 복음의 풍성함을 누리고 있는 이들이 “책을 모으고, 분류하고, 배송해주는 수고”를 통해, 가난한 이들이 영적 자원을 얻게 된다면, 그 수고는 하늘에 쌓이는 보물이 될 것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1) 영원한 세계, 곧 죽은 뒤 심판과 천국·지옥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삶이 그것을 결정한다는 점을 강력히 일깨워준다. 2) 두 번째로, 우리가 이 땅에서 ‘부자(영적·물질적 부유)’가 되었다면 반드시 나누고 베풀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부자가 되었다는 것은 돈이 많다거나, 교회 내에서 높은 직분을 가지고 있다거나, 성경을 많이 읽고 신학적 지식이 많다는 식의 다양성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 어느 형태이든 간에 “주어진 것을 이웃과 나누지 않고 자기 만족에만 몰두한다면”, 그 끝은 부자가 갔던 길과 다르지 않을 수 있음을 경고한다. 아울러 그것이 곧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 예수님께서“자신의 소유라고 착각하지 말고 가난한 자를 위해 써라”라고 하신 말씀과 직결된다.

부자가 마지막에 자신의 형제들을 구원하기 위해 “나사로를 보내달라”고 간청하는 대목은, 사실상 “죽은 다음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 친척, 친구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바로 지금” 해야 한다. 죽은 뒤에는 건너갈 수도, 다시 내려갈 수도 없다. 그리고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이미 모세와 선지자들, 곧 구약성경과 신약계시 그리고 교회의 수많은 설교와 가르침을 통하여 “충분한 빛”을 받았다. 믿지 않는 것은 더 이상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강퍅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도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믿지 않았다. 심지어 로마 병정들이 빈 무덤을 보고 놀라서 달려갔음에도, 이 사실을 숨기려 돈으로 매수하며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갔다”고 거짓 보고를 만들어냈다. 기적이 부족했던 게 아니다. 마음이 굳어 있었기에, 아무리 기적이 일어나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내게 좀 더 확실한 표적을 보여주시면 믿겠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말씀에 기록된 진리가 이미 충분히 증거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말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믿음의 증거를 드러내야 한다. 장재형목사가 이러한 측면에서 자주 인용하는 구절 중 하나가 바로 로마서 10장 8-9절인데,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우리 곁에 있고, 그 진리에 입을 열고 마음을 열면 누구든지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리고 구원받은 이들이 합심하여, 아직 말씀을 모르거나, 영적으로 굶주린 ‘나사로들’을 돌보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누가복음 16장의 이 두 가지 비유(옳지 않은 청지기와 부자와 나사로)는 모두 “지혜롭게 사는 길”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이라 할 수 있다. 이 땅에서 재물이든 은사든 무엇이든 맡겨진 자들이라면, 결국 우리는 언젠가 결산할 날이 온다. 또한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므로, 이 땅에서의 모든 결정과 행동이 영원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거듭 강조하시는 ‘나눔의 중요성’이 더해지며, 부자의 사례를 통해 경고하신다. “문 앞에 있는 나사로를 외면하지 말라.” 우리가 문만 열면 만날 수 있는 여러 나사로들에게, 과연 얼마나 다가가고 있는지, 얼마나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만약 아무도 문 앞의 나사로를 돕지 않는다면, 이런 교훈을 들어도 그저 흘려버린다면, 결국 부자가 맞이한 음부의 고통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 비유의 결론이다.

이렇게 볼 때, 누가복음 16장의 메시지는 2천 년 전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부유하든 가난하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해당된다. 영원과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다면, 우리는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져야 한다. 이 땅이 전부라고 여기는 자들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다른 삶의 방식을 추구해야 한다. 흙으로 돌아갈 육체가 아니라, 영원히 주님 앞에 설 영혼을 위해 깨어 있어야 한다. 동시에 재물이 주어졌든, 말씀과 영적 풍요가 주어졌든,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것이 이생에서 준비되어야 할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문제임을,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힘주어 가르치신다.

장재형목사는 누가복음 16장에 대한 설교에서, “하늘의 시선을 가진 자는 필연적으로 이웃의 피로를 느끼게 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은 늘 한 영혼 한 영혼에 관심을 두고 계시고, 그 마음을 품는 자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일 전혀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나사로를 아예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라면, 그것은 이미 내 마음이 ‘영적인 교만’ 내지 ‘무감각’에 빠진 것이고, 회개해야 할 시점이라는 뜻이다. 부자는 원하든 원치 않든, 죽음 이후에 자신의 돌이킬 수 없는 상태를 직면했지만, 우리는 아직 이 땅에서 숨 쉬며,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복음을 전할 수 있고, 섬길 수 있는 시간적 유예를 가지고 있다. 이 시간은 길지 않고, 언젠가 끝난다. 그러므로 부자와 나사로 비유는 우리의 남은 삶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자 기회이기도 하다.

2. 부자의 책임과 나사로의 소망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확장해 해석하면, 단지 물질의 부자와 가난한 자만을 다루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말씀의 부요’를 가진 자와 그것을 받지 못해 배고파하는 자의 구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나 신자들은 어떤 모습일까? 정말 이 땅에는 여전히 ‘부자’와 ‘나사로’가 함께 존재한다. 한쪽에서는 풍성한 말씀, 수많은 기독교 서적, 다양한 세미나와 컨퍼런스를 통해 풍족한 영적 양식을 누리는가 하면, 다른 한쪽은 성경 한 권조차 구하기 어려운 지역에서 영적 기갈에 허덕인다. 또는 도심의 대형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화려한 찬양과 강력한 사역들이 있는 반면, 도시 변두리나 시골 지역, 혹은 다른 나라의 황폐한 마을에는 아직 복음이 전혀 미치지 못한 곳도 많다.

이를 직면한 장재형목사는 “우리는 곧 ‘영적 부자’이며, 우리가 나서서 ‘영적 나사로’를 돕지 않으면 큰 문제”라고 거듭 설파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 선교 활동이나 문서 사역을 살펴볼 때, 사실상 영어권을 비롯한 서구의 교회와 신학 기관들에는 수많은 책이 쌓여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보물 같은 자료들이 정작 영적 양식을 찾는 이들에게 도달하기 전에 폐기되거나, 헐값에 버려지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반면 인도, 아프리카, 동남아 등 많은 나라에서는 신학교를 세워도 도서관을 채울 책이 없어서, 학생들이 제대로 된 연구나 공부를 진행하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이 현상은 비단 책만의 문제가 아니다. 물리적 자원, 재정, 교육, 의료, 복지 등 다양한 차원에서 “부자와 나사로”가 공존한다.

성경적 원리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일하시고, 교회를 통해 사랑을 흘려보내신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돌보며, 병든 이들을 찾아가는 것을 매우 중요한 사명이라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5장에 등장하는 양과 염소의 비유는,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는 선언으로 요약된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구체적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예가 바로 이 말씀이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나눔이지만, 그것이 나사로가 살아가는 데 결정적인 도움일 수 있다. 더 나아가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것은, 곧 예수님에게 하듯이 행동하는 것이라 성경은 말한다.

이 ‘나눔’이 단순히 “내가 가진 것으로, 부족한 자를 잠시 돕는다”라는 시혜적 관점에서만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진정한 나눔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이 사람이 어떻게 하면 온전히 회복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데서 출발한다. 단순히 물질적 지원만 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제자로 세우고, 그가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보다 넓은 의미의 섬김이 요청된다. 이것이“영혼을 구원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사역”이다. 때문에 교회는 기도와 헌신, 그리고 사람을 세우고 훈련하는 과정을 동시에 감당해야 한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속 부자가 간과했던 것은, “문 앞에 있는 나사로의 영혼과 육신을 다 돌봐야 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부자가 그 책임을 인식했다면, 그에게 있어선 단순히 부스러기를 던지는 시혜를 넘어, 나사로의 근본 문제(병과 굶주림)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현대의 선교와 구제 사역 가운데서도, 단기적인 접근이 아닌 장기적 차원의 발전 전략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단기 선교나 구제금 지원 등은 중요한 시작점이 될 수 있으나, 결국 그 지역 사람들이 말씀을 배우고, 스스로 교회 공동체를 세우며 자족하며, 또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만드는 체계가 필요하다. 이것이 곧 “지혜로운 청지기”의 태도이며, 예수님의 “지상명령(마태복음 28장)에 충실한 사역”이라 볼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여러 차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단순히 교세 확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고, 듣는 이들이 실제로 변화되어, 또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로 자라가는 것”이라고 해설한 바 있다. 특히 말씀을 담은 서적과, 그 서적을 읽고 공부할 수 있는 교재, 그리고 이를 가르칠 교사와 지도자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부자와 나사로”라는 다소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셨을까? 이는 인간의 시선을 확실히 붙잡기 위함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흔히 범하는 실수 중 하나는, “현재의 삶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부자는 자신이 이미 얻은 재화와 위치를 당연하게 여기고, 더 나아가 영적인 책임이나 소명을 외면한다. 그러나 이 땅의 재물과 지위는 죽음 앞에서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이 “내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사용했느냐”에 따라, 심판대 앞에서의 평가가 완전히 달라질 뿐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땅에서 누린 것이 클수록, 하나님 앞에서 나누어준 것의 여부가 더 철저히 검사될 것”이라 경고하면서, 우리에게 “깨어 베풀고, 여유를 남에게까지 확장시키는 삶”을 권면한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단순히 지옥과 천국이라는 ‘공포’와 ‘희망’의 대비가 아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영적 부자가 되었을 때, 문 밖에 있는 영적·물질적 가난한 자들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실천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전통적으로 교회가 강조해 온 “사랑과 자비”는 결코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다. 실제 생활에서, 그리고 전 세계 선교 현장에서 구현될 수 있는 실천적 가치다. 내가 가진 떡 한 조각, 헌 옷 한 벌이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양식일 수 있고, 더 나아가 복음서 한 권, 신학 서적 한 권이 누군가에게는 영원한 운명을 바꾸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사랑은 행동으로 증명된다”는 유명한 문장은,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기인한다.

이 비유가 계속해서 말하는 “두 세계(이생과 저생)”에 대한 인식은 우리 인생관의 근본 골격을 바꾼다.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면, 사람들은 당장 눈앞의 이익과 쾌락을 추구하며 살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영원”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고, 죽음 뒤에 하나님 앞에 선다는 두려움 혹은 경외심을 갖게 만든다. 그리하여 지금 이 땅에서의 태도와 행실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는 윤리나 철학의 차원을 넘어, “신앙”이라는 절대적인 이유가 뒷받침한다. 장재형목사는 설교에서 “현세적 만족을 넘어서 천국의 기쁨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자처럼 “그 손가락에 물을 찍어 혀를 서늘케 해달라”고 애걸하게 될 영원한 고통을 맞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비유가 주는 최종적 결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이 땅의 삶은 유한하며,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따른다. 둘째, 우리가 이 땅에서 가난하고 헐벗은 나사로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거스르는 것이며, 마지막 날 큰 책망에 이를 수 있다. 셋째, 이미 우리 손에 모세와 선지자들, 그리고 복음서와 사도들의 증언이 주어져 있으므로, 변명할 여지가 없다. 넷째, 진정한 회심과 섬김은,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가운데 일어난다. 다섯째, 살아 있을 때 결단하지 않으면, 죽은 이후에는 변경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 여섯째, 그리스도인의 부요함은 물질의 유무만이 아니라, 영적·말씀적 풍성함까지 포함한다. 이 부요함은 반드시 나눔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일곱째,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여러 영적 스승들이 가르치듯, 우리가 “북 스토어 사역” 등 구체적인 나눔의 장을 마련하고, 전 세계의 나사로들을 돕는 것은 ‘복음적 실천’이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이 “영원”과 맞닿아 있음을 환기해주며, 우리의 삶과 태도, 심지어 마음의 동기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점검하도록 이끈다. 우리의 재물과 지식과 힘이 오로지 자신만을 만족시키는 데 쓰인다면, 결국 그것은 심판 날에 우리에게 짐이 될 수 있다. 반면, 그것들을 통해 나사로를 살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는 통로가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늘에 상급을 쌓는 길이 된다. 신앙생활이란 단순히 예배당에 출석하는 일이 아니라, ‘영원’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의 윤리에 따라 사는 행위다. 그리고 그 윤리의 핵심이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태복음 10:8)는 주님의 말씀에 담겨 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며 부딪히는 수많은 고민들, 예컨대 “인생의 목표”, “가치관”, “직업 선택”, “재물의 사용”, “시간과 재능의 투자” 등등은 결국 이 비유 속 메시지와 직결된다. 부자처럼 이생에서만 만족하고자 하는지, 아니면 나사로처럼 비록 고난 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마지막 위로를 소망하는지, 또는 내가 부자라면 주변의 나사로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날마다 묻고 답해야 한다. 결단을 미루지 말아야 한다. 삶이 언젠가 끝난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죽음 이후에 맞이할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믿기에, “오늘”이라는 시간이 소중하다. 지상의 나그네 길을 마칠 때, 아브라함의 품으로 인도되는 사람이 될 것인지, 음부의 불꽃에서 혀를 식히려 애원하는 사람이 될 것인지, 바로 누가복음 16장이 던지는 묵직한 질문이다.

이처럼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시선”을 기반으로 한 인생관과, 그 인생관에 따라 실천해야 할 사랑과 나눔의 행동을 강력하게 설파한다. 또한 “지혜로운 청지기”의 비유가 그 바로 앞에 배치됨으로써, 예수님은 우리가 가진 것(물질, 재능, 지식, 영적 부요 등)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사용하라는 가르침을 강화하신다. 부정하게 보이는 방법을 쓴 옳지 않은 청지기도 “주어진 상황에서 최대한으로 이익을 준비했다”는 이유로 주인에게 지혜롭다고 칭찬을 받았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사람들은“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돕고, 복음을 전하고, 이웃과 은혜를 나누는 일”에 얼마나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겠는가?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 지혜”이며,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설교자들이 교회에게 촉구하는 바이다.

누가복음 16장은 “이 세상에서 부를 누리고 있다면, 그것으로 아버지의 마음처럼 사랑을 실천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지혜를 칭찬하실 것이다”라는 주님의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그 핵심은 결국 사랑과 자비, 그리고 천국 소망이다. 이 비유에 담긴 다차원적인 메시지를 기억하며, 각자에게 맡겨진 가정, 일터, 교회와 선교 현장에서 실제로 적용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주님께서 물으실 것이다. “내가 너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어떻게 사용했느냐? 너는 ‘문 앞의 나사로’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 그날에 부끄러움 없이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나사로’를 돌아봐야 한다. 그것이 누가복음 16장을 읽는 독자들이 붙들어야 할 메시지이며, 장재형목사가 누차 강조해 온 “복음의 실제적 적용”인 셈이다.

www.davidja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