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 방언·예언과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의 바른 해석

장재형(장다윗)목사는 고린도전서 14장을 오늘의 교회 현실과 곧바로 접속시키며, 성령의 은사가 실제 예배와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자유와 질서가 어디에서 만나는지를 차분하고도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바울이 25절에서 그려 보이는 장면—예언의 말씀이 불신자의 마음을 꿰뚫어 숨은 일이 드러나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교회의 본질을 압축한 그림이다. 교회는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를 과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말씀의 선포를 통해 인간 내면의 죄와 상처가 드러나고 치유되는 자리다. 그래서 장재형 목사는 어떤 프로그램보다도 말씀의 선포와 가르침을 교회의 첫 사명으로 내세운다. 빛이 비출 때 심중이 드러나고, 그 드러남이 회개와 경배로 이어지며, 그 순간이야말로 교회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언하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26절은 초대교회 예배의 생동감을 그대로 전한다.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침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특정 직분자가 모든 것을 주도하는 단선적 구조가 아니라, 성도 각자의 은사가 능동적으로 흘러드는 참여의 예배였다. 그러나 바울은 즉시 대원칙을 붙인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여기서 ‘덕을 세운다’는 오이코도메(oikodomē), 곧 집을 건축한다는 뜻이다. 개인적 감흥이나 영적 과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세워짐이 은사 사용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예배의 어떤 표현이든—찬양이든, 가르침이든, 방언과 통역이든, 계시의 나눔이든—교회를 실제로 ‘건축’하지 못한다면 방향을 고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령의 불은 반드시 사랑이라는 난로 속에서 타올라야 한다. 들불은 빨리 번지지만 금세 모든 것을 태워버리듯, 무절제한 은사 사용은 공동체를 지치게 만든다. 반대로 화덕 같은 은사는 오래, 깊게, 따뜻하게 공동체를 데운다.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풍성했지만 미숙함과 무질서가 잦았다. 특히 방언의 남용이 문제였다. 바울은 27절에서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 차례를 따라, 한 사람이 통역하라”고 구체적으로 규정한다. 이 지침은 당시 모임이 얼마나 뜨겁고 역동적이었는지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당시 교회는 가정교회 형태가 많았고, 사도나 상주 목회자가 늘 함께한 것도 아니었으며, 신약 성경이 아직 정경으로 묶이지도 않았다. 자유로운 구조 속에서 성령의 역사는 폭발적으로 일어났고, 그만큼 정밀한 분별과 공적 질서가 요구되었다. 그래서 29절에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하라”는 원칙이, 30절에는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하라”는 절제가 이어진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에서 초대교회의 성숙한 상호성이 보인다고 말한다. 성령의 은사는 내가 받은 능력을 증명하는 마당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실 공간을 서로 비워 드리는 자리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하되(12:31), 그 은사는 더 깊이 사랑하고 더 넓게 위로하며 더 견고히 세우기 위한 도구여야 한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요 화평의 하나님이시다”(33절)는 선언은 바로 이 균형의 정점에 놓인다. 성령 충만은 소란이 아니라 평화 속에서 발휘되는 생명력이다.

이 지점에서 장재형 목사는 교회 사역이 본질적으로 ‘예언자’를 따라 움직인다는 통찰을 덧붙인다. 예언자는 미래를 점치는 점술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미리 받아 공동체에 전하는 입이다. 안디옥 교회가 선교의 전초기지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선지자들과 교사들”(행 13:1)이 있었다. 사도적 리더십, 예언의 통찰, 교사의 분별, 집사의 봉사가 유기적으로 맞물릴 때 교회는 방향과 동력을 얻는다. 주목할 것은 초대교회에서 예언의 은사가 여성들에게 자주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사도행전 21장 9절은 빌립의 네 딸이 모두 예언했다고 증언한다. 이 배경 없이 14:34의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구절을 읽으면 오해하기 쉽다. 장재형 목사는 이 구절이 여성의 발언권이나 사역 자체를 금하는 보편 규범이 아니라, 고린도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공예배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규정이라고 해석한다. 유대 회당 전통에서는 여성이 남성과 함께 동등하게 참여하기 어려웠다. 반면 복음은 갈라디아서 3:28과 에베소서 2:14–16이 선포하듯, 사람 사이의 담을 허물어 공동체 안에 새로운 평등을 가져왔다. 해방의 첫 세대는 언제나 자유를 배우는 과정을 지난다. 성령의 분출을 절제하지 못해 공적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이 실제로 있었을 수 있고, 바울의 “잠잠하라”는 명령은 권리 박탈이 아니라 예배를 지키기 위한 목회적 처방이었다. 36절의 날 선 질문—“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는 자기 계시를 절대화해 공동체 위에 서려는 교만을 겨냥한다. 바울이 꺾고자 한 것은 성별이 아니라 무질서와 독선이었다.

여성 안수 문제도 이 연장선에서 조명된다. 장재형 목사는 여성들이 성령의 은사, 특히 예언으로 교회를 세우는 데 크게 쓰임받았음을 강조하며, 실제 목회 현장에서 여성에게 안수를 주기 위해 교단의 울타리를 넘어선 경험을 회상한다. 이는 시대정신이나 이념의 산물이 아니라, 본문이 요청하는 목회적 적용이다. 예레미야 31:22의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는 새 언약의 이미지는 하나님이 새 시대에 여성의 주도적 섬김으로 공동체를 세우신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물론 모든 리더십은 질서 안에서, 공적 검증 속에서, 덕을 세우는 방향으로 행사되어야 한다. 미국의 가장 큰 개신교 교단 가운데 하나인 남침례회(SBC)가 여전히 여성 목사 안수를 반대하는 데 이 구절을 근거로 삼아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바울의 의도는 억압이 아니라 보호, 차별이 아니라 건축이었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소명이 분명하고 공동체의 인준 속에서 검증되었다면, 성별은 제한이 될 수 없다. ‘잠잠’은 침묵 강요가 아니라 공예배를 보호하는 사랑의 절도다.

예언의 분별 문제를 다루면서 장재형 목사는 사도행전 21장의 아가보를 예로 든다. 아가보는 성령 안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될 것을 예언했다. 바울은 그 예언을 무시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예언의 진실성을 인정했으나, 더 큰 소명—복음이 예루살렘과 로마에까지 증거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후 전개는 하나님의 기묘한 인도를 드러낸다. 바울이 잡힐 때마다 로마군의 보호를 받았고, 암살 위협 속에서도 법정과 호송 체계를 통해 안전하게 이동하여 마침내 로마에 이르렀다. 장재형 목사의 해석은 분명하다. 예언은 곧장 복종해야 하는 절대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한 중요한 재료다. 어떤 때는 예언이 경고한 위험을 피하는 것이 하나님의 길이지만, 또 어떤 때는 그 위험을 통과해 더 큰 뜻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예언을 멸시하지 말되 분별하고(살전 5:20–21), 교사의 가르침으로 균형을 잡으며, 사도의 리더십 아래 질서 있게 순종하고, 서로를 경청하는 영적 문화를 길러야 한다. 이 문화가 바로 ‘덕을 세우는 교회’의 핵심이다.

공예배에서의 방언과 통역에 관한 바울의 세밀한 지침도 여전히 유효하다. 장재형 목사는 통역이 동반된 방언이 공동체 전체에 교훈과 위로를 준다고 설명한다. 통역 없는 방언은 개인의 경건에는 유익할지라도 공동체를 세우지는 못한다. 그래서 바울은 공적 자리에서는 통역을 요구하고, 통역이 없으면 잠잠하라고 한다. 반대로 예언은 직접적으로 공동체 유익을 낳지만, 여기에도 무제한의 발언권은 없다. “둘이나 셋”의 질서, “분별”의 절차, “잠잠하라”는 절제는 예언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장재형 목사는 방언과 예언을 경쟁 구도가 아닌 상보 구도로 읽는다. 방언은 개인의 심령을 깨우고, 예언은 공동체의 건축을 이끈다. 두 은사는 사랑의 길(고전 13장) 위에서 만날 때, 교회는 경건의 능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혼돈을 피한다.

오늘의 교회가 맞닥뜨린 현실적 과제는 생명력을 잃지 않으면서 질서를 잃지 않는 것이다. 제도와 형식은 안전망이 될 수 있지만, 성령의 활력을 가두는 벽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통제 없는 자유는 은사를 과시하는 무대로 전락해 분열을 낳는다. 장재형 목사는 초대교회로의 건강한 복원을 제안한다. 성령의 은사를 적극 사모하되, 모든 은사의 사용은 공동체가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명료하고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하며, 무엇보다 사랑을 ‘가장 좋은 길’로 삼아야 한다. 이때 남성과 여성이 함께 서서, 사도적 리더십과 예언적 통찰, 교사의 분별과 집사의 봉사가 한 몸처럼 움직인다. 빌립의 딸들처럼 예언하는 여성들이 교회를 세우고, 아가보처럼 앞길의 위험을 경고하는 예언이 공동체를 깨우며, 교사들이 말씀의 등불을 밝혀 분별의 기준을 제공하고, 봉사자들이 질서를 든든히 받쳐 준다. 이런 유기적 협력은 특정 교단의 승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성령의 선물, 말씀의 규범, 겸손한 순종이 빚어내는 열매다.

무엇보다 본문 끝자락의 결론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39–40절). 이 두 문장은 14장의 황금률이다. 예언을 사모하되 방언을 금하지 말라—금지의 신학이 아니라 열림의 신학이다. 동시에 모든 것을 적당하게, 질서대로 하라—무절제의 신학이 아니라 건축의 신학이다. 여기서 ‘적당하게’는 타협이 아니라 합당함, 곧 공동체의 유익과 외인에 대한 증거를 함께 고려한 분별을 뜻한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이 균형을 회복할 때, 세상은 다시 교회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 말한다. 불신자도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복음이 설명되고, 예언의 빛이 각 사람의 심중을 비추며, 방언과 기도가 개인을 새롭게 하고, 모든 것이 사랑의 줄 안에서 정돈될 때 사람들은 고백할 것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구절로 여성의 사역을 막는 벽을 세우기보다는, 그 구절을 통해 공예배의 질서와 분별의 필요를 배우고 그 질서 안에서 남녀가 함께 은사로 교회를 세우는 길을 열어야 한다. 여성 안수 문제 역시 같은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이 분명히 주신 은사와 소명이 공동체의 인준 속에서 확인되었다면, 성별은 제한이 될 수 없다. 물론 리더십은 권리일수록 무게가 커지기에 더 큰 겸손과 순종으로 섬겨야 한다. 그러나 그 겸손은 억압의 침묵이 아니라 사랑으로 자발적으로 선택한 절제다. 결국 고린도전서 14장은 억압과 금지를 위한 텍스트가 아니라, 성령의 활력과 교회의 질서를 결혼시키는 지혜의 장이다. 교회는 다시 오이코도메의 현장, 곧 건축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 성령의 불과 말씀의 등불, 사랑의 줄자와 겸손의 수평기, 분별의 저울이 함께 일할 때, 우리는 25절의 약속—불신자의 심중이 드러나고, 그가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고 증언하는 장면—이 오늘의 예배 한복판에서 다시 실현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장재형 목사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길어 올린 복음의 길이며, 오늘의 사역자와 교회가 붙들어야 할 주의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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